|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
도청사건에서 경악한 것은 권력과 돈의 결탁 부분 관행이었으니 덮자? 사회를 실패하게 하는 망조관행은 치유해야 한다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지리학을 하면서 문명비평에도 일가를 이루고 있는 자레드 다이어먼드 교수의 최근 저서에 <무너짐>(Collapse)이라는 것이 있다. 모든 자빠지는 것들과 무너지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우선 제목에서부터 눈이 끌릴만한 책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회는 어떻게 성공하고 어떻게 실패하는가”라는 것이 이 책의 부제다. 어떤 사회는 성공하고 어떤 사회는 실패한다. 실패하는 사회는 왜 실패하는가? 다이어먼드의 언어사용에서 흥미로운 것은 ‘왜’(why) 아닌 ‘어떻게’(how)라는 의문사가 선택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라는 것은 방법과 절차와 선택을 물을 때 쓰는 말이다. 사회가 망하는 데도 ‘방법’이 있는가? 망하는 사회는 ‘망할 방법’만을 골라 선택하는가? 다이어먼드의 진단을 요약하면 대체로 “그렇다”이다. 망하는 사회는 ‘잘못된 결정’을 선택함으로써 붕괴와 자멸의 길로 들어선다. 사회의 실패는 주로 네 가지 상황에서 발생한다. 첫째는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예견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채 틀린 결정을 내리는 경우이고, 둘째는 심각한 문제가 이미 발생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거나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다. 셋째는 의지의 결여, 넷째는 불충분성이다. 사회가 어떤 문제를 발견하긴 했으나 그것을 해결하려 들지 않는 것이 의지의 결여라면, 문제를 알고 해결하고자 하면서도 “비용이 너무 들어”라며 우물거리거나 ‘너무 늦게 너무 적은’ 쥐꼬리 해결책만 내놓다가 시기를 놓쳐버리는 것이 불충분성에 의한 실패다. 어떤 사회도 망하고 싶어서 스스로 망조 든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상식에 기대어 말하면, 다이어먼드가 선택이라고 부른 것은 의미의 증감 없이 글자 그대로 ‘비고의적 실패’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실패는 뒤집어 보면 ‘실패의 선택’이다. 사회는 함부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망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망한다. 사회를 무너지게 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 결정의 오류, 곧 틀린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따라가기다. 옳은 결정이건 틀린 결정이건 모든 결정은 이미 선택 행위다. 문제의 발생 가능성을 미리 예상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실패는 인간 능력의 일반적 한계와 관계된다. 그러나 그 실패조차도 따져보면 상상력을 억눌러 죽이기로 ‘선택한’ 사회의 실패일 때가 많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중대한 실패를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망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다이어먼드가 제시한 실패의 범주들은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문제의 발생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하는 상상력 실패,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문제로 감지하지 못하는 인식의 실패, 문제는 발견했지만 의지 부족으로 해결에 나서지 못하는 우유부단, 문제를 알면서도 제 때에 해결책을 동원하지 못하는 안일성과 무능, 이런 실패의 상황들은 남의 것이 아니다. 광복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온갖 번쩍거리는 행사들은 열심히 치루면서도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는 망조들은 차분히 점검해내지 못하는, 아니 점검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무슨 망조인가? 정부의 실패나 시장의 실패도 한 사회를 망하게 할 수 있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회 자체가 실패의 가능성을 보지 않기로 선택할 때의 실패, 곧 ‘사회의 실패’이다. 이 사회의 실패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위험한 것이 “경제를 살려야 한다”라는 썩은 구호의 ‘썩었음’을 감지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우리 사회의 고질이다. 경제가 잘못 되기를 아무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재벌기업들과 권력의 유착, 언론과 법조까지도 손에 넣어 부당한 방법으로 지배권을 확장하려는 재벌 행태, 그 행태를 두둔하고 감싸기 위해 제 정신 놓고 앞장서는 매체조직들의 파렴치 매판행위, 이런 것들과 ‘경제살리기’는 아무 관계가 없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되레 척결하고 청산해야 할 부패한 관행들을 독버섯처럼 키워주기 위해 30년간 국민을 볼모 잡고 협박하고 속여 온 것이 “경제를 살려야 한다”라는 구호다. 이 썩은 구호를 계속 방치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망하기로 작정하는 가장 확실한 실패의 선택이다. 이번의 소위 도청 테이프 사건을 보면서 경악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민주 국가의 집권당이 되겠다고 나섰던 정치세력이 가장 반민주적인 방법으로 돈과의 유착을 추구했다는 정황의 포착 부분이다. 이것이 단순 정황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오랜 관행이었기 때문에 그냥 덮고 넘어가야 한다? 권력과 검은 돈의 결탁은 지난 세월 우리 사회를 기본에서부터 멍들게 한 만성질병이다. 그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개혁 시도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현 정부의 개혁노력도 ‘개코’(개혁코드)라는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어 휘청거리고 있다. 그러나 사회를 실패하게 하는 망조관행들은 드러내어 청산하는 것만이 최선의 치유책이다.사회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들 시민 자신이, 사회가, “우리는 실패를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특히 요즘 같은 때는 하루 세 번씩,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한다. 시민이 시민인 것은 그가 사회의 무너짐을 거부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 거부가 시민의 권리다. 이미 오래 전부터 발생해 있었으나 그 치유는 무한 연기되어 온 문제, 그것이 지금 시민 앞에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시민법정’을 세워야 할 궁벽한 순간으로 지금 내몰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동안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라는 면 제목으로 격주마다 글을 써주신 김종철 교수께서 지난 7월29일치 글 ‘근대화의 완상과 자멸’을 끝으로 필진에서 빠지게 됐습니다. 김 교수는 “지면을 특정인이 오래 독점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도 있지만, 8월부터 제가 미루어오던 일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8월에는 해외에 나가 좀 있다가 올 예정입니다”라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 동안 좋은 글들을 보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새 필자로 도정일 교수께서 참여하시게 됐습니다. 이미 깊고 풍부한 사유를 토대로 관록있는 글을 써온 도 교수는 기존 면 제목을 그대로 이어받아 독창적인 글쓰기를 선보이게 될 것입니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