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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25 18:36 수정 : 2005.08.26 11:27

베네치아에있는 성 마르코 성당의 스팬드럴. 르원틴과 굴드는 적응이라고 간주되는 대부분의 형질들이 스팬드럴과 같이 부산물일 뿐이라고 적응주의를 비판했다.(위) 르원틴은 유전자 환원주의를 비판해왔다. 심포지엄에 발표하고 있는 르원틴.(아래 왼쪽) 굴드는 대중매체에도 종종 등장했다. 만화 <심슨 가족>이 등장시킨 고생물학자 굴드.

‘생물학계의 칼 세이건’ 스티븐 제이 굴드 박학다식 화려한 필력 탁월한 과학해설가 한 평생 “진화가 진보가 아니다” 설득 집단유전학 진보 이뤄낸 러처드 르원틴 ‘스팬드럴 논문’ 써 주류생물학계에 직격탄 사회현상 DNA 환원 설명 집중 비판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 ⑮ 굴드와 르원틴-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나

우리가 언제부터 해설자에 따라 축구 중계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던가? 2002년 월드컵 전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 분야에서 해설가의 구실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때는 언제쯤일까? 분수령은 틀림없이 칼 세이건의 텔레비전 시리즈 ‘코스모스’였을 것이다. 이 시리즈는 현재까지 대략 60여개 국의 5억 인구가 시청한 것으로 추산되며 그 결과물인 <코스모스>는 지금도 전 세계 과학서적 코너에 거의 언제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선지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다. 당시 동료들은 “대중들과 노닥거리느라 연구할 시간도 없을” 세이건의 외도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실제로 그는 우수한 연구 역량에도 불구하고 하버드대학에서 종신교수직을 거부당했고 미국국립학술원의 문턱을 끝내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선구적 노력 덕분에 과학자가 할 수 있을 거라 기대되는 일의 목록은 훨씬 더 길어졌다.

하버드대학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 J. Gould)는 말하자면 생물학계의 세이건이다. 달팽이의 화석 연구로 학자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발생과 진화의 관계를 탐구한 <개체발생과 계통발생>이라는 전공서에서 출발하여 1천쪽에 이르는 대작 <진화론의 구조>를 끝으로 2002년 61살의 생을 마감했다. 이 두 전문서 사이에 출간된 20권의 저서는 크게 보면 전부 대중 과학서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연사>라는 잡지에 무려 27년 동안(1974년 1월~2000년 12월)이나 거의 매월 고정 칼럼을 연재했는데 그것들을 엮어 만든 책이 10권이나 된다.

굴드의 왕성한 생산력에 매료된 어떤 학자는 그의 모든 저작물에 대해 통계 분석을 해보기까지 했다. 총 22권의 저서, 101편의 서평, 497편의 과학 논문, 그리고 300편의 <자연사> 에세이. 이것이 지식인으로 살다간 굴드의 화려한 성적표다.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전방위적이다. 언어(특히 라틴어), 음악, 건축, 문학, 심지어 야구 통계까지, 그가 과학해설을 위해 동원한 지식 자원에는 경계가 없다. 독자들은 그의 박식함과 화려한 필치에 넋을 잃곤 한다.

책 22권·논문 497편·서평 101편…


‘탁월한 해설가’ ‘현란한 글쟁이’라는 그의 꼬리표에 이견은 별로 없다. 하지만 ‘혁명적 이론가’ ‘진화론의 대가’라는 묘비명을 달지 말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굴드는 생명의 진화에 대한 기존의 다윈주의 관점에 도전하는 듯한 몇 가지 견해들을 발전시켰다. 그는 묻는다. 진화는 정말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가? 진화는 진보인가? 모든 것이 다 적응인가?

우선 그는 화석기록의 불연속성을 대충 얼버무리며 진화의 점진적 변화를 강변하는 전통적 다윈주의에 반기를 들고, 진화가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담은 ‘단속평형론’을 제시했다. 한때는 마치 다윈주의를 대체할 기세였다. 육상경기에 비유하면 이 이론은 진화가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다양한 템포(도움닫기, 점프, 착지 등)가 있는 멀리뛰기와 같다는 발상이다. 이에 대해 <눈먼 시계공>의 도킨스와 <다윈의 위험한 생각>의 데넷은 “허풍 좀 그만 떨라”고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굴드는 진화가 진보가 아니라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 한평생을 헌신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풀하우스> 등에서 생명이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화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생명의 역사에서 우발적 요인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생명이 진화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유는 주가가 바닥을 치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이치와 똑같다. 곧 박테리아처럼 가장 간단한 생명체로 시작한 생명의 진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다양한 구조의 생명체들로 진화할 수밖에 없지만, 이를 진정한 진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이다. 외계생물학자가 본다면 지구의 주인은 인간도 개미도 아닌 박테리아일 것이다. 40억년의 역사에도 한결 같이 양적으로 최고의 자리를 지킨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박테리아 만세!

게다가 그는 생명의 진화가 우발성에 크게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5000만년 전에 소행성이 지구를 덮치지 않았더라면 당대를 호령하던 공룡은 멸종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포유류의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지구 역사의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틀어보라. 인류와 같은 존재도 없을 것이며 전혀 다른 생물군이 나왔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이런 견해는 진화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몇 가지 주요 전환들(가령 세포의 탄생)을 강조하는 주류 진화생물학자들과 생각이 다른 부분이다.

그의 반골 기질은 1970년대를 풍미하던 윌슨류의 적응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모습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1979년에 그는 “성 마르코 성당의 스팬드럴과 팡글로스적 패러다임”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적응을 손쉽게 양산하는 당시 진화생물학의 풍조를 호되게 비판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논문에서 그는 ‘적응주의’를 ‘스팬드럴’(spandrel)이라는 건축양식에 빗댄다. 스팬드럴은 대체로 역삼각형 모양인데 돔을 지탱하는 둥근 아치들 사이에 형성된 구부러진 표면이다. 베니스의 성 마르코 성당의 돔 밑에 있는 스팬드럴은 기독교 신학의 네 명의 사도를 그린 타일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굴드는 적응주의자들이 그런 스팬드럴을 보고 그것이 마치 기독교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설계된 부분인 양 오인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스팬드럴은 아치 위에 있는 돔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부산물일 뿐인데 말이다. 이런 비판은, ‘코가 안경을 받치기 위해 진화했다’는 식의 생뚱맞은 주장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경고이며 ‘단지 그럴 듯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시험 가능한 가설들을 제시하라는 주문이었다.

주류 생물학자와 날카롭게 대립

당시의 사회생물학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 이 스팬드럴 논문은 굴드가 하버드의 진화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R. Lewontin)과 함께 작성한 글이다. 르원틴은 1960~70년대에 전기영동법(electrophoresis)을 고안하여 개체들 간의 유전변이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를 인류 최초로 측정한 사람이다. 그는 이 기법을 초파리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에도 적용하여 인종내 유전변이가 인종 간 유전 변이보다 더 크다는 놀라운 사실도 발견했다. 이런 의미에서 르원틴은 집단유전학의 큰 진보를 일궈낸 탁월한 학자이다. 1974년에 출간된 <진화적 변화의 유전적 기초>는 이 분야에서 고전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르원틴은 지난 30년 동안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디엔에이(유전자) 독트린>, <삼중나선> 등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현상들을 디옥시리보핵산(디엔에이)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려는 시도들을 집요하게 추적한 지식인으로 더 유명하다. <사회생물학>의 윌슨, <이기적 유전자>의 도킨스, <이중 나선>의 왓슨 등이 그의 주요 표적이었다. 그가 보기에 사회생물학이나 인간게놈 프로젝트 모두가 과학적으로 문제가 많고 이념적으로도 옳지 않은 ‘유전자 환원주의’에 근거해 있다.

그는 언젠가 “맥락과 상호작용이 핵심이다”라고 진술한 바 있다. 이때 ‘상호작용’이란 유전자와 환경, 개체와 환경, 그리고 원인과 결과 간의 관계를 지칭한다. 그는 유전자와 환경의 효과가 상호 의존적이라는 점, 표현형의 발현 범위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 여러 원인들 중에 유전자가 특권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환경이 개체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 등을 부각시켰다. 이 모든 주장은 굴드의 경우와 같이 주류 생물학자들과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는 부분이다.

장대익/ 한국과학기술원 강사 daeik@chollian.net
이런 ‘삐딱이 정신’은 굴드와 르원틴을 한데 묶어 줄 수 있는 공통분모이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석학이지만, 사회생물학, 인간게놈 프로젝트, 아이큐(IQ) 테스트, 행동유전학의 밑바탕에 흐르는 이념을 지극히 혐오하고 칼 마르크스를 열렬히 사랑하는 좌파 생물학자들이다. 그리고 대중과 소통하고 사회에 참여하는 일이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무라는 사실을 알고 실천한 몇 안 되는 과학자다.

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동료로부터 인정받기에만 헉헉대는 우리 과학계 현실에 이들의 삶은 전문가 공동체, 대중 그리고 사회 속에서 과학자의 자리가 과연 어디인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이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다. 과학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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