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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25 19:10 수정 : 2006.01.18 16:24

뉴욕에서 구조공학 엔지니어로 일하는 러셀 데이비스(왼쪽)와 필 칼리가 동쪽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 이들은 두 달만에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완주하기 위해 초스피드로 달리고 있다.

하나둘씩 스러지는 켄터키 벽촌 가게들 대형 도매상들이 더 이상 물건을 배달해주지 않아
닭을 한번에 200마리 이상 주문하라니 시골 가게가 일년 내내 팔아도 다 못팔 물량이다
자동차족들의 쉼없는 야유와 공격 내가 대항할 무기는 기껏해야 개 스프레이뿐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15

미국에는 광장이 발달하지 않았다. 유럽의 소도시들처럼 사방으로 길이 통하는 마을 한 가운데 포석이 깔린 탁 트인 광장은 물론 촌로들이 장기 두고 한담하던 한국의 옛 마을 정자 같은 것도 보기 힘들다. 사실 마을 자체가 발달하지 않았다. 널찍널찍 떨어져 큰 집을 짓고 따로 산다. 그래도 이웃의 소식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궁금증을 푸는 곳이 카페(Cafe)라고 부르는 음식점이거나 컨트리 스토어라고 부르는 잡화점이다.

카페는 상당한 규모의 마을에만 있다. 카페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오믈렛을 시켜 먹을 수 있지만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이 지나가는 캔터키의 마을들에는 주로 잡화점만 있다. 잡화점은 델리(Deli)라고 부르는 간이식당을 겸하고 있다.

나는 어느 주 사람들이 더 친절하거나 덜 친절하다는 얘기를 믿지 않는다. 주 전체를 일반화할 수 있을 만큼의 경험도 없을 뿐 더러 사람들이 지역에 따라 특별히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그 점에서 캔터키는 남다른 데가 있다. 해로즈버그 모텔에 들렀을 때 사무실 벽에는 이런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Writers of bad checks will be beaten, stomped and stabbed. Survivors will be prosecuted.(부정 수표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얻어맞고 짓밟히고 칼에 찔릴 것이다. 그래도 살아남는다면 기소될 것이다.)"

엄청난 마진 챙기는 담배회사


이렇게 살벌한 문구를 왜 붙여놨느냐고 물으니 매니저인 아주머니는 표정 하나 안 바꾼 채 “맘에 드느냐”고 되묻기만 했다.

반면 커크스빌 지나서 처음 나온 잡화점에서는 들어가자마자 “물이 필요하지?”하면서 주인 아주머니가 물통 그득히 물을 떠다 줬다. 비프 샌드위치에는 스테이크 두께로 고기를 썰어서 넣어준다. 가격은 1달러50센트. 인심이 후하다.

가게의 바깥 주인인 레이 밀러는 박제한 사슴들이 “왜 나를 죽였느냐”고 뻔히 내려다보는 잡화점 한 구석에서 육즙을 듬뿍 바른 비스켓으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사슴 한 마리는 1995년에, 다른 한 마리는 2년 전에 죽인 거라고 밀러는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건 그렇고, 가게 사정은 갈수록 빠듯하다.

“이곳은 산세가 험해서 담배 농사와 목축 외에는 다른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런데 담뱃잎이 지난해 1파운드 당 2달러에서 1달러50센트로 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담배 농사를 포기했다. 그 돈으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담배농사가 안 돼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도 줄었다. 담뱃잎 1 파운드면 담배 1000 개피를 만든다.”

1000 개피면 50갑. 50갑이면 한 갑에 3달러라고만 해도 150달러. 아무리 세금이 많이 붙는다고 해도 담배회사로서는 엄청난 마진일 것이다.

포즈빌로 가는 길에 잡화점에 들렀더니 남자 3명이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 중 한 명의 눈길이 나를 따라왔다. 말을 걸었다. “그 소식 들었어? 어제 캘리포니아에서 코네티컷까지 자전거 타고 횡단하던 여자가 실수로 차들 사이에 끼이는 바람에 차에 깔려 숨졌다는 거?” 세상 돌아가는 일 챙긴 지 오랜데 들었을 리가 없다. 안 그래도 차들에 위협을 느끼던 차에 그런 얘기를 들으니 꺼림칙하다. 기자출신 아니라고 할까 꼬치꼬치 캐물었다. 사고가 여기서 났느냐고 물으니 그들이 “그건 아닌 것 같고.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럼 사고가 난 게 어제 맞느냐고 했더니 “그것도 잘 기억 안 난다”고 얼버무렸다. 진짜 그런 사고가 난 건지 아니면 놀리려고 지어낸 얘긴지 분간이 안 됐다.

세 사람을 뜯어보니 모두 허름한 작업복 차림인데 한 사람은 젊은 축이고 두 사람은 60대로 보였다. 농부냐고 하니까 “그래, 우리 마리화나를 키워”라고 말한 뒤 자기들끼리 껄껄 웃었다. 60대 중 키 큰 사람이 웃음을 멈추고 “그게 아니고 저 젊은 친구는 트럭을 몰고 이 친구는 솜씨 좋은 기술자며 나는 컨설턴트”라고 말해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농담하고 있다는 기색을 눈치 채고 “뭘 컨설트하냐”고 묻자 “그는 모든 것을 다 컨설트한다”며 계속 농담이다. 키 작은 60대가 끼어들어 “이 사람은 컨설턴트가 아니고 인설턴트(insultant; 모욕하는 사람)라고 정정했다. 이 인설턴트는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꺼내 보여줬는데 그 고리에는 ‘Certified crazy person’이라는 문구가 그럴듯하게 새겨져 있었다. 누구한테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인증 받았느냐고 물으니 이 키 큰 60대는 “잊어버렸다”고 둘러댔다.

그러던 차에 펠트 모자를 쓰고 멜빵 바지에 흰 셔츠를 받쳐 입은 점잖은 신사가 이 좁은 가게에 들어왔다. 키 작은 60대는 “닥터가 왔다”며 “여보게 닥터, 이 친구 한국에서 왔대”라고 나를 인계했다. 새로울 게 없는 일상에 신기한 녀석이 굴러왔으니 축구공처럼 이리 저리 차다가 새로운 선수에게 패스한 것. 완고하게 생긴 이 닥터는 나를 옆에 앉히더니 “한국에 간 적이 있었다”며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진짜 닥터냐고 묻자 그냥 빙그레 웃으면서 저 친구들이 놀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오늘은 110㎞를 달려야 할 판이어서 갈 길이 먼데 이 ‘닥터’가 붙들고 늘어졌다. 왠지 그의 말에는 뿌리치기 어려운 무게가 느껴졌다. 아침 8시 촌 가게에서 나누기에는 불편한 주제의 얘기들이 나온다. 그는 리버럴들이 위선자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피겠다고 말만 한다고 비판했다.

캔터키 커크스빌 부근에 있는 잡화점에서 주인 레이 밀러가 자신이 사냥한 사슴 두 마리가 내려다 보는 가운데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260명 고객 거느린 ‘비공식’ 세무사

어차피 대화를 피할 길이 없다고 판단, 나도 묻기 시작했다. 어디 사느냐, 뭐하고 지내느냐, 자식들은 있느냐 등등. 그의 이름은 밥 디킨스. 교사인 부인은 다른 도시에서 일하고 아들 한 명은 도쿄에서 영어강사로 있다. 67살인 그 자신은 공군에서 20년을 항공기 항법사로 근무했고 한국에는 62년에서 63년까지 2년 동안 주둔했다.

그가 불편한 게 없느냐고 물어서 한글로 인터넷 접속이 가장 아쉽다고 하자 그럼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해서 1.6㎞ 떨어진 그의 3층 양옥으로 자전거를 몰고 갔다. 그는 아들이 쓰던 컴퓨터에 로그인해서 컴퓨터를 맘대로 쓰게 해줬다.

한가로운 시골에서 자신의 힘으로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그의 꿈은 실현됐다. 하지만 조그만 가게들이 하나 둘 없어져서 몇 십 마일을 가야 장을 보고, 이발을 하고, 병원에 갈 수 있어서 불편하다고 말했다. 가게들이 문닫은 것은 대형 도매상들이 물건을 더 이상 배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식품점은 닭을 한번에 200마리 이상 주문하지 않으면 배달하지 않겠다고 해서 가게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는 그 가게는 아마 200마리를 일년이 가도 다 팔지 못할 것이라면서 모든 게 대형화해야 살아남는 월마트 신드롬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큰 기업들의 편으로 알려진 공화당을 지지한다.

이 벽촌에 사는 그의 직업은 놀랍게도 사람들의 세무 보고를 돕는 비공식 세무사(Tax Preparer)다. 자격증은 없지만 260명의 고객을 가진 하나의 세무법인이다. 20년간 군 복무하는 동안 배운 세금보고 요령으로 친구들의 세무보고를 돕다가 잘한다는 소문이 퍼져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간판도 없고 선전도 하지 않는 그가 고객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입소문. 심지어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 있는 사람이 차를 몰고 와서 세금보고를 의뢰한다고 한다.

하룻밤 자고 가라는 그의 청을 뿌리치고 늦은 길을 서두르는데 화이츠빌로 가는 길에 차들이 많아지면서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갯길에서 한 여성 운전자가 그냥 지나쳐 가도 되는데 완전히 안전한 데가 나올 때까지 서행하면서 내 뒤를 따라왔다. 그러자 그 차 뒤를 따라 오던 빨간 색 승용차가 경적을 울리며 “빨리 가라”고 소리질렀다. 그 여자가 나를 지나치자 그 빨간 차가 내 앞으로 오더니 뒷문이 열리고 한 젊은 녀석이 “여기 달리지 마, 알았어?”라고 경고했다. 나는 “자전거 타기가 허용돼 있어”라고 맞받아쳤다. 그 친구가 다시 “꺼지라”고 소리치자 다시 “자전거 타기가 허용돼 있어”라고 소리쳤는데 내 목청으로 그렇게 큰 소리가 날 수 있을까 나도 놀랄 정도였다. 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자동차족의 탄압에 쌓인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듯했다. 그리고 페달을 세게 밟아 그 차를 좇았다. 놀란 그 차는 내빼버렸다. 속 시원한 화풀이였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다른 고개를 힘겹게 올라가는데 앞에서 오던 차가 갑자기 서행하더니 창문이 열리고 네 명이 “이 X팔 놈아”를 일제히 외치고 “약 올라 죽겠지 용용”-한국식으로 해석한다면-하는 손짓을 하면서 다가왔다. 바로 그 빨간 차였다.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공격이어서 대응할 채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들의 반격은 짧았다. 소리 지르려고 했을 때에는 그 차는 이미 지나쳐버렸다. 생각해보니 일이 악화돼서 집단 몰매를 당할 상황이 생기면 내게는 그들에게 대항할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있다면 개 스프레이인데 스프레이를 맞고 그들이 개들처럼 깨개갱 돌아설 리 만무하다. 바이크 라이더는 그렇게 무력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평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나 보다.

마음공부를 더 해야겠다

어제 캔터키 마드리드 부근을 지나가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의 서쪽 출발지이자 나의 목적지인 오리건 주에서 동진해 6주만에 캔터키에 진입한 두 청년을 만났었다. 러셀 데이비스와 필 칼리. 뉴욕에서 구조 공학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데 9·11이 터졌을 때는 무역센터에 가서 청소를 거들었다고 한다. 두 달 간 휴가를 내 초스피드로 횡단 중인데 마치 옆 동네에 잠시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같다. 짐이 거의 없다. 이들은 텐트나 버너 같은 것을 일절 가져오지 않고 모텔과 식당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그러니 하루에 200㎞, 심지어는 220㎞를 달린 날도 있다고 한다.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러셀은 미주리 주에서 차 운전자가 던진 맥주캔에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다치지는 않았다”면서 “다치지만 않으면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대단한 경지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주라는 예수까지는 아니지만 무저항 비폭력의 간디가 연상된다.

두 사람은 “혼자서 그것도 주로 캠핑을 하면서 가는 길이 더 고될 테지만 남는 것은 더 많을 것 같다”면서 “서쪽으로 갈수록 경치가 아름다워져 그 노력이 충분히 보상 받을 것”이라고 덕담을 한 뒤 갈 길을 재촉했다. 나는 마음 다스리는 법을 더 배워야 한다. 홍은택 hongdongz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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