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9.01 15:54 수정 : 2005.09.01 15:54

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문화인류학과

잠실운동장, 윌드컴경기장… 지난 20년 동안 숱한 감동의 기억을 보관하고 있는 스타디움은 이제 스포츠와 지역생활을 밀착시켜 가는 과정에서 거점 노릇을 해야 한다

생활속의 문화사회학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야구를 사랑한다. 60년 동안 정치를 지켜봐온 늙은이도, 바로 어젯밤부터 정치를 알게 된 중학생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예컨대 원칙과 룰이 있는 쪽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세상에는 별처럼 무수한 야구팀들이 원칙과 룰을 지키며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그 반짝임 속에서 결국 자신의 별을 발견하고, 응원하게 된다. 즉, 저 별은 나의 별이다.’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중에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스포츠의 자리는 각별하다. 스포츠 신문들은 선정적인 헤드라인과 사진으로 눈길을 끌고, 텔레비전의 스포츠 뉴스는 현란한 명장면들을 쏟아낸다. 큰 시합이 벌어진 다음 날 사람들은 그 경기의 내용과 선수들에 대한 평가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스포츠가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그 대결이 ‘원칙과 룰’에 입각해 벌어지고, 과정과 결과가 비교적 투명하기 때문이다. 현실세계에 결여된 순수함과 공정함을 갈망하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소설에서 주인공(작가)은 한국의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82년부터 3년 반 동안 삼미 슈퍼스타즈 팀에 바쳤던 자신의 순정을 애틋하게 회상하고 있다.

스포츠의 진수를 맛보려면 역시 경기장에 가보아야 한다. 스타디움은 현대인들에게 일상의 시공간에서 벗어난 멋진 신세계를 선사한다. 수많은 관중들의 흥분과 긴장된 시선 속에서 벌어지는 힘겨루기, 그 스릴과 박진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에 사람들은 경기장을 찾는다. 살아있는 영웅들이 연출하는 짜릿한 드라마, 예상을 뒤엎는 통쾌한 반전,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는 신들린 몸짓 등은 신화가 되어 길이 전승된다. ‘그림 같은 슛’ ‘창조적 게임 감각’ ‘아트 사커’ 등의 표현이 있듯이, 플레이의 절묘함은 예술의 경지에 버금간다. 팬들은 그 탁월한 스펙터클에 감동하면서 자신이 응원하는 팀과 일체가 되고, 공유 감정은 자기 초월과 집단 숭배로 장엄하게 고양된다. 스타디움은 그러한 대중심리를 끓여내는 도가니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에는 많은 스타디움이 세워졌다.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을 즈음하여 탄생한 잠실종합운동장은 번영한 코리아를 만방에 알린 발신 기지였다. 2002년 월드컵대회를 위해서는 무려 10개 도시에 스타디움이 신축되었는데, 그 각각에는 도시마다의 특색이 가미되었다. ‘방패연과 황포돛배 등의 전통미를 구현’(서울), ‘항구도시답게 배의 돛과 마스트를 승화’(인천), ‘전통 주거공간인 안마당과 같은 아늑함을 추구’(대전), ‘분화구와 오름을 형상화’(서귀포)…. 말하자면 스타디움이 하나의 작품으로 여겨진 것이다. 이제 스타디움은 단순한 물리적 시설이 아니라 상징적 기호로 유통된다. 2006년 월드컵 개최지 독일도 뮌헨 슈타디온 경기장에 4천2백억원을 투자하면서 ‘마술적인 아우라’의 웅장한 디자인을 구현하였다. 향후 세계 축구의 새로운 신전이 되겠다는 야심이 거기에 깔려 있다. 스타디움은 자연스럽게 지역 문화의 구심점 역할도 한다. 인구 20만 명의 소도시지만 우리에게 암스텔담보다 친숙한 아인트호벤처럼, 스타디움과 축구팀으로 도시를 세계에 알리면서 지역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사례도 많다.

그런데 스타디움은 건설비뿐 아니라 보수 및 유지비도 엄청나게 들어가는 시설이다. 2002년 월드컵을 위해 지어진 경기장 가운데 한두 군데 이외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명백한 과잉투자로 판명되었는데도 밀어붙인 대형 공사(그렇게 많은 스타디움 신축은 월드컵의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의 후유증은 앞으로 각 지자체의 재정을 계속 압박할 것이다. 복합 레저 및 상업 시설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그 입지 조건 때문에 근원적인 한계에 봉착해 있는 도시도 몇 군데 있다. 그런가 하면 수익에만 집착한 나머지 주민들의 생활에 폐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 한 예로 상암경기장에서는 얼마 전 한 달 동안 대형 음악 공연을 치르면서 소음을 너무 심하게 발생시켜 마포구청은 인근 주민들의 원성과 민원에 시달려야 했다.


스타디움을 시민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디자인은 무엇일까. 팬들이 스포츠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다양하게 개발하는 창의성이 요구된다. 견학 프로그램의 예를 들어보면, 방문객들이 경기장만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의 락커룸이나 더그아웃에 앉아 본다든지, 투구 스피드 측정이나 미니 게임 등을 해보는 체험 코스를 갖춘 외국의 사례 등을 참고할 만 하다. 몇 해 전 나는 오사카 돔구장의 불펜에서 볼을 던지면서 잠시 투수의 심정이 되어본 적이 있는데, 스타디움과 시민이 이렇게도 만날 수 있구나 하고 감흥을 받았다. 스타디움은 경제적 수익성만이 아니라 공익성도 담보한다. 그 거대한 공터는 유사시에 긴요하게 사용된다. 95년 일본에서 한신 대지진이 났을 때 고베의 스타디움은 피난소가 되었고 재건에 필요한 건축자재들을 쌓아두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스타디움은 숱한 감동의 기억들을 보관하는 하드웨어다. 그 의미의 자원은 도시민의 생산적 여가문화를 빚는 소프트웨어로 변환될 수 있다. 지금까지 애국심의 응집 장치 또는 기업의 홍보수단 쪽에 많이 치우쳐 있었던 스포츠를 지역생활 쪽으로 밀착시켜 가는 과정에서 스타디움은 거점 기능을 할 수 있다. 어릴 때 스포츠를 놀이로 즐기다가 소질이 발견되면 서서히 프로로 옮아가는 시스템, 시민과 구단이 명실상부하게 한 몸을 이루는 유럽의 클럽제는 좋은 모델이 된다. 조기축구회에 가입한 청소년들이 동네 아저씨들과 섞여 잔디구장에서 경기를 벌일 수 있다면, 모처럼 확보된 스타디움들은 2002년 거리응원의 감동 이상의 추억과 전설을 자아내는 ‘꿈의 구장’이 될 것이다.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