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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탈식민주의’ 예술가 그의 눈물은 후대의 자양분/ 임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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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일본 건너가 발레 배워 귀국 뒤 발레연구소 세우고 후진 양성 힘써 ‘백조의 호수’ 국내 첫 공연 안무 연출 맡아 발레전문학교 건립과 단원 처우 개선 평생 소망 말년엔 고생시킨 가족 생각하며 엉엉 울기도
이재현의 인물로 세상읽기/ 한국 발레 주춧돌 놓은 임성남씨 아버지 제사가 있어 휴가를 겸해 어머니이 계시는 시골엘 다녀왔다.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는 늦여름 들판으로의 산책을 꿈꾸었지만 비가 계속 내리는 바람에 옛 기와집 마루에 엎드려서 빗소리를 들으며 책만 읽다가 돌아왔다. 이번 독서 휴가의 수확은 뭐니뭐니 해도 얼마 전에 간행된 임성남 회고록 <하늘 높이 춤추며>이다. 임성남(1929-2002)은 한국 발레계에 주춧돌을 놓은 선구자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그가 죽기 전 한두해 전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날에 그를 대접할 때 벌어진 일이다. 그 자리에서 그는 제자들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라, 한국적인 것을 살린 좋은 창작품을 만들어라”하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가족들로 얘기가 번지자 임성남은 10분 이상을 ‘엉엉 엉엉’ 울었다.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길을 수십년간 걸어온 늙은 예술가의 내면 세계가 잠깐 열렸다 닫히는 순간이었다. 임성남은 전주사범학교 4학년 때 한동인 발레단의 공연을 보고 한동인의 연습실을 찾아 문하생이 된다. 임성남은 한동인이 해방 직후 만든 서울발레단의 공연에 출연하기도 하다가 6.25가 터지자 피난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간다. 임성남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원래 어렸을 때 꿈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및 작곡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 임성남의 큰 누나가 용돈을 모아 철수하는 일본인으로부터 피아노를 구입한 적이 있는데 임성남은 아버지 몰래 피아노를 치다가는 들켜서 야단을 맞고 결국 피아노는 지방의 작은 학교에 기증하게 되었다고 한다. 임성남이 발레로 진로를 바꾸게 된 것은 ‘핫토리-시마다 발레단’의 로맨틱 발레 <레 실피드>를 보고 나서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핫토리 치에코는 블라디보스톡 출생의 러시아계 혼혈이고 시마다 히로시(한국명 백성규)는 연희전문 출신인데 둘 다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문하생으로 당시 일본에서 발레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핫토리-시마다 발레단은 고마키 발레단과 더불어 1950년대 일본 발레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임성남은 미군부대 자동차 운전으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핫토리-시마다 발레단에서 수업을 받게 된다.일본 발레계서 ‘전설적 인물’ 부상 정식 수업이 끝난 뒤에도 텅 빈 연구소에 연습을 하면서 스승의 눈에 띄어 레슨비를 내지 않고도 가장 비싼 개인 레슨을 받던 임성남은 곧 두각을 나타내게 되고 젊은 발레인들과 더불어 동경청년발레단을 창립한다. 1953년 임성남은 고전 발레의 대표적 레퍼토리인 <백조의 호수>에서 왕자역을 받아 급부상하게 된다. 나중에 일본에 유학을 간 임성남 제자의 확인에 의하면 이미 그 때 임성남은 일본 발레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성공이 보장된 스타의 삶’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6.25 직후 무용계에서 임성남은 정통 발레를 체계적으로 배운 유일한 사람이었던 셈인데, 그는 귀국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딴 발레연구소를 설립하고 <백조의 호수> 2막을 공연하는 등 개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62년에 국립무용단이 창단되자 단장을 맡았고 1972년에 국립발레단이 국립무용단으로부터 분리되자 30년간 계속해서 단장을 맡아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4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게 된다. 임성남의 안무로 국립발레단이 <백조의 호수> 전막을 공연한 것은 1977년이었는데 이것이 순전히 한국 사람에 의해 안무, 연출된 최초의 대작이었다. 임성남은 1960년 파리에서의 <춘향전> 공연을 안무하기도 하고 1964년 <허도령>, 1967년 <까치의 죽음>, 1974년 <지귀의 꿈> 등을 통해서 한국적인 발레와 창작 발레를 추구하기도 한다. 임성남은 1960년 후반에 미국에 한 달간 연수를 가게 되는데 싼 호텔에서 싼 밥을 먹으며 돈을 모은 데다가 장학금을 받아 체류 기간을 연장해서 무용 기법을 새로이 배우고 연구하게 된다. 그는 이때 장학금의 일부를 국내 가족에게 생활비로 송금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절 사진을 보면 그는 이미 상당히 머리가 벗겨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제자의 회상에 의하면 공연에 출연할 때 머리에 바르는 크림을 그는 ‘구두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구자는 외롭기 마련이다. 그는 늘 “외국에서 무용가가 무대에 설 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코치 선생이 있어서 늘 도와주는데 나는 선생님이 없어서 쓸쓸하다”고 제자들에게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평소 그의 소신 중의 하나는 발레를 제대로 하려면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발레는 춤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혼 소식을 그에게 알리려던 제자가 “하라는 발레는 안하고 어디서 연애질이야”는 호통을 들을까 봐서 전전긍긍했다는 대목에서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임성남 자신은 결혼을 했거니와, 그것도 그가 미망인을 만나게 된 것은 젊은 시절의 미망인이 동생을 그의 발레연구소에 데리고 왔었기 때문이었다. 평생에 걸친 그의 또다른 소신은 발레 전문학교의 건립과 직업 발레단 단원의 처우 개선이었다. 다른 춤 장르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발레는 어려서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한 학년에 50-60명 정원으로 훈련기간 9년 정도의 발레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그는 계속해서 역설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발레단이라고 할 수 있는 국립발레단의 경우에 단원들이 계속해서 대학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도 결국 생계 문제 때문인데, 이 문제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해결되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 나는 임성남에게서 ‘탈식민주의’ 예술가의 초상을 본다. 한국 사회는 정치군사적 식민주의로부터는 해방이 되었지만 그 ‘식민지 효과’가 사회 제도의 모든 부문에 뿌리깊이, 특히 기억과 언어를 둘러싼 일상의 문화적 체험 영역과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남아 있었는데, 무용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절의 무용계는 최승희와 조택원이 대표하는데 이 두 사람은 일본인 이시이 바쿠의 제자였고 그 이래로 우리 무용계는 일본에서 정립된 ‘신무용’이란 개념 아래에서 발전을 해왔다. 신무용이란 과거의 전통적 춤과는 다르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임성남은 전쟁 전에는 일본에 가서 그리고 60년대에는 잠깐 미국에 가서 무용을 배우고 연구했다. 대학으로 가지 않고 무용단 이끌어 그런데 일본에서 배운 정통 발레 교습법을 한국에 전파하고 정착시킨 임성남에게 충격을 가한 것은 다름 아닌 1970년대 중후반 이후 유니버설발레단의 태동이었다고 한다. 막강한 재원을 바탕을 하여 당대 서구의 발레교육제도에 의한 새로운 교습법 체계가 도입된 것이다. 신무용 이전에 춤은 궁중의 정재무나 광대, 재인, 무당, 기생의 민속적인 춤, 혹은 농촌 공동체에서 노동 및 생활과 결합되어 있는 춤으로서 존재했다. 신무용이란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춤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창작 예술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6.25 이후 분단된 현실에서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무대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중심축으로 해서 우리 춤은 무용예술로서 제도화되어 왔다. ‘한국’ 무용, ‘창작’ 무용, ‘현대' 무용 등을 둘러싼 상당히 혼돈스럽고 고통스러운 노력은 이러한 제도적 환경에서의 예술적 분투인 것이다. 다 알다시피, 물적인 토대가 약하므로 이 땅의 무용 예술가들은 대학의 무용과 교수가 되거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대학 입시나 대학교수 개인이 이끄는 무용단을 둘러싸고 많은 비리들이 생겨났고 무형문화재로 선정받기 위해서 치열한 다툼을 해야만 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대학에 적을 두지 않은 채 무용단을 이끌어온 임성남이라든가 그와 같은 세대이자 부산시립무용단장을 지낸 황무봉과 같은 분들의 존재는 한국 무용계에서 빛을 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제자들이 자산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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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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