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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1 16:20 수정 : 2006.02.22 19:48

도서출판 들녘 ‘이제, 승려의 입성을 함이 어떨는지요?’

아깝다 이책

한낮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편집부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햇볕에 익은 얼굴이 발그레했다. 누구지?

“어어, 자네가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별일 없으셨죠, 선배님?”

대학교 후배인 그는 대학원에서 사회학과 불교학을 전공한 뒤 조계종 교육원 교육과장으로 있으면서 한국불교근대사 연구모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학교 때부터 침착하고 올곧았던 후배였다.

 그는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산 증인으로 평가받는 석주 큰스님의 회고록 편찬을 위해 자료를 정리하다가 조선 후기, 즉 개화기 역사 속의 거인들을 만나게 되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무애행으로 익히 알려진 경허 스님을 비롯하여 개화당의 이동인, 김옥균, 유대치 등이 바로 불교의 이치로 세상을 변혁하려던 구국운동가였음을 발견하는 순간, 머릿속이 휑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개화당이란 서구 문물과 실학 사상에 바탕을 두고 수구파에 대항하던 인물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개화당 면면이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특히 대선사요 대자유인으로 세간에 알려진 경허 스님이 결사운동과 교단 재건을 주도한, 역사의식이 투철한 선각자라니?

하여, 그는 큰스님 회고록에 앞서 한국불교 1600여년의 세월 속에서, 조선 5백년 동안 불교가 걸어온 험난한 길을 파헤치기로 결심했고, 6년에 걸쳐 온갖 자료를 섭렵하고 정리한 끝에 비로소 탈고하게 되었다며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형광펜과 빨간펜으로 얼룩진 원고와 온갖 사진 자료들, 그리고 마지막 수정원고를 담은 디스켓을 보니 정말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수고로움이 오죽했을까.

 그 원고는 <이제, 승려의 입성을 함이 어떨는지요?>라는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원고를 건네받은 지 5개월 만이었다.

삼국시대에 이 땅에 뿌리내리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국교로서 융성기를 맞이한 불교. 그러나 고려 말 사찰의 세속화와 승풍의 타락으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핍박받기에 이르렀던 불교.

이 책은 조선시대 지배계급이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유교를 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 불교를 어떻게 억압해왔는지, 그 속에서 불교는 어떤 자생력으로 그 시련을 이겨냈는지를 개략적으로 살펴본 뒤 1876년 개항에서 1912년 사찰령이 시행되기까지, 조선 근세사 속의 불교의 굴절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건국과 더불어 승려의 도성 사대문 안 출입을 막았다. 그러던 것이 1895년 일본의 승려 사노의 상서로 입성금지 해제가 되었다. 이는 곧 일본이 한국 불교를 와해시킴과 동시에 일본 불교로써 우리 민초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한국불교의 행보에 대한 정체성 논란이 시작되었고, 이와 더불어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말미암아 불교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책은 질곡의 역사를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정리해 놓았으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일일이 근거를 밝혀놓았다.

해방 60년. 일제가 우리를 침탈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전략을 세웠는지, 민족 정기와 민족 정신을 어떻게 유린했는지를 생각하면, 새삼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커다랗게 다가온다. 경현주/도서출판 들녘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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