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01 17:04
수정 : 2005.09.01 17:04
말글찻집
비애왕 4년 1867년이 명치(메이지) 3년이다. 재팬 사람 팔호순숙(八戶順叔)이 차이나 <북경신문>에 투고하기를 “지금 일본이 조선을 토벌하고자 병을 일으키고 있다”(日本現有興師, 往討朝鮮之志)고 했다. 조선은 이것을 가볍게 봐 넘겼다. 코리안의 병이 바로 여기 있다.
아들이 왕실로 입양되어 왕이 되면 그 아비가 대원군이 된다. 이명복이 왕이 되니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10년 동안 권력을 잡았다.
그보다는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왕이 되어 나라를 맡아야 했다. 청국에는 이홍장(1823~1901)이 있었고, 일본은 이등박문(1841~1909)이 맡았는데 이들을 상대할 사람이 바로 이하응이었다. 그랬다면 이등박문을 앞세운 재팬의 침략을 좀더 적극적으로 막을 수 있었을 터이다. 하다 안 되면 자결하고 책임을 지고 물을 사람이 그였다.
그러나 그는 유약한 아들 명복을 왕으로 올려 놓고, 뒤에서 자신이 나라를 다스려 보리라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아니했다. 이명복이 왕이 돼 끝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일본왕한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은 묘실에 들 수가 없는데, 부왜역적 완용이 묘호를 고종으로 정했다.
대원군이 당시 내치는 잘했으나 바깥과의 관계는 잘못했다. 1866년 병인년에 프랑스 배가 들어왔다. 물리쳤다. 이것을 ‘병인양요’라고 하면서 높이 치켜들었다. 1871년, 신미년에 아메리카 병이 강화도에 들어왔다. 물리쳤다. 이것을 ‘신미양요’라 했다. 대원군이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잘못이었다. 서양나라를 모조리 물리치고 일본을 부드럽게 대한 것이 대원군이 취한 외치였다. 거꾸로 했다. 척왜비(斥倭碑)를 세워야 했는데, 척서비(斥西碑) 또는 척양비를 세운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는 ‘주화’(主和) 곧 청나라와 화친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원군의 ‘척화’는 일본도 청나라도 아니고 양이(서양사람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프랑스나 아메리카는 땅을 탐내는 나라가 아니고, 무역을 주로 하는 나라였다. 일본은 땅을 탐내어서 군대로 강도짓을 하려는 나라였다. 임진왜란에서 겪어 보았으면서도 왜병이 물러가니 ‘리왈기왈’한 결과가 또다시 ‘왜란’이었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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