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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1 18:30 수정 : 2005.09.01 18:30

이재웅 첫 장편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가난이 늙게 만든 열두살 소년 중년 사내 ‘소유물’이 되어 수상쩍은 방에서 ‘손님’ 받는 이복누이 아파트 얹혀 산다 그런데, 욕망과 타락의 지옥도 속 소년의 눈물을 누가 멎게 하랴

신인 작가 이재웅(31)씨가 첫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실천문학사)를 내놓았다.

주인공은 “이미 늙은 소년” ‘나’다. 이름은 이준태. 비록 열두 살 어린 나이지만, 그는 소설 곳곳에서 자신을 ‘늙은 소년’이라 지칭하며 남들에게도 그렇게 주장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어려서 일찍 늙은 것은 가난 때문이다. “가난은 나를 늙게 했다”(18쪽)고 그는 말한다.

할머니와 단 둘이 반지하 방에서 살던 그는 할머니가 죽자 이복누이에게 맡겨지는데, 이복누이 혜숙은 중년 사내 문곽호와 동거하는 아파트에서 몸을 파는 신세다. 일찍이 가출해 유흥업소와 매음굴을 전전하던 누이는 그 과정에서 진 빚을 곽호가 갚아 주자 그의 ‘소유물’이 되어 뭇 사내들의 정액받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저 애의 몸은 제게 있어 공장의 기계 같거든요”라고 문곽호는 말한다).

천장과 사방에 유리가 달리고 모조 가죽 채찍과 막대기, 재갈, 거대한 인조 성기 등이 비치된 수상쩍은 방에서 누이가 ‘손님’을 받으며 신음과 비명을 흘리는 아파트가 주인공 소년의 거주지다. 그러나 보통의 소년들에게라면 충격과 공포의 근거가 될 이런 상황이 주인공 소년에게는 그다지 놀랍거나 실망스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는 “거짓은 밝고 행복하고 진실은 어둡고 불행”(36쪽)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늙은 소년’이기 때문이다.

물론 ‘늙은 소년’이라고 해서 비정상적인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미쳤고(172쪽), 그 역시 “미치기 일보 직전”(71쪽)인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소설은 모두가 미친 세상에서 혼자서라도 미치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모두가 미친 세상에서 아이들이 덩달아 미치지 않기 위해 택하는 전술이 조숙인지도 모른다. 주인공 준태의 주변에는 그말고도 조숙하고 영악한 아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를 첫사랑이라 부르는 동급생 완주는 뜻밖에도 준태의 누이를 모델로 삼아 언젠가 창녀가 되겠노라 다짐하는 소녀다. “세상은 좋아지지 않아”(95쪽)라고 단언하는 완주는 냉철한 비관주의자라 할까. 고아원을 탈출해 공원에서 기숙하는 태호. “나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어. 나는 억세게 재수가 없을 뿐 아니라 버려진 아이니까”(161쪽)라고 말하는 그는 무력한 패배주의자로 보인다. 준태가 일찍이 일곱 살이었을 때 선교회 유치부에서 만난 동갑내기 계집애는 어떤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괴롭히면서 준태만은 “나처럼 가난하니까”(250쪽) 괴롭히지 않는다는 이 아이는 당돌한 ‘계급주의자’라 할 만하다. 어쩌면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나만큼 늙지는 않았지만 나만큼이나 영악했다”(189쪽)는 준태의 말처럼 조숙과 영악은 아이들의 공통된 특성인지도 모른다.

이재웅 첫 장편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거짓은 행복하고 진실은 불행”


소년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소설에서 도덕적 타락의 중심에 있는 소년의 누이가 사뭇 순결한 구원의 상징처럼 그려지는 것이 이채롭다. 누이는 ‘사랑의 상업적 타락’이라 할 매춘에 종사하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향한 ‘진짜 사랑’에 매달리고, 그러느라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안는다. 소설 속 현재 상황에서도 빵 공장 노동자인 송봉권과의 금지된 사랑과 그에 대한 문곽호의 방해는 중요한 갈등과 모순 요인으로 작용한다. 누이는 송봉권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문곽호의 배를 칼로 찌르고 도망쳤다가 다시 붙잡히며, 소설의 결말은 과도를 옷 안에 숨긴 소년이 문곽호의 등장을 기다리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또한 누이는 소년에게 오이디푸스적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가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엄마가 나를 버리고 달아”(7쪽)난 뒤, ‘나’를 “업어 키운”(23쪽) 것이 바로 누이였다. 이렇게 엄마 같은 누이에게 ‘나’는 은밀한 연정을 품는데, “그녀의 미소는 나를 황홀하게 했다”(103쪽)거나 “그가 원하는 곳은 누나의 품 안이었다”(109쪽), 또는 “나는 침대 속으로,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우리는 껴안았다”(174쪽)는 대목들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나’는 누이와 송봉권의 사랑을 위해 문곽호와 대결하는가 하면, “그 남자는 아기처럼 그녀의 젖꼭지를 빨고 있다.(…) 송봉권이 나와 다른 것이 무엇이던가?”(110쪽)라며 송봉권에 대한 누이의 사랑을 질투하는 이중적이며 모순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욕망과 타락, 폭력과 몰염치의 극을 달리는 지옥도를 그린 이 신인 작가의 소설에서는 어쩐지 조세희씨의 연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이 연상된다. 냉혹한 단문과 드물지 않게 보이는 번역투 및 경구투의 문장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난쏘공> 연작 중 한 편인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를 떠오르게 하는 “잘못은 담임선생에게 있었다”(38쪽)는 문장 때문인지도. 어쨌든, 작가의 문체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몇 대목을 인용해 보자.

‘난쏘공’의 냉혹한 단문 연상

“누나는 울고 있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눈물을 흘려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난 열 살 이후부터 울어본 적이 없었다.”(116쪽)

“지친 사람만 슬픈 음악을 들어요.”(127쪽)

“네 누나는 태석이 엄마와 얘기를 해야 해. 태석이 엄마는 그걸 원하신다.”(141쪽)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칼을 숨긴 채 문곽호를 기다리는 동안 준태는 <한스의 밤의 여행>이라는 어린이 그림책의 내용을 반추한다. 그러나 “한스는 행복했어요”라는 그림책의 마지막 구절에 대해 그는 발악하듯 거부감을 표한다: “거짓말이야, 순 거짓말이야.”(319쪽) 뭉크의 그림 속에라도 갇힌 듯 절규하는 ‘늙은 소년.’ 그런데, 누가 이 소년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까. 사진 실천문학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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