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08 17:34
수정 : 2005.09.09 14:24
말글찻집
1873년 11월 최익현이 대원군은 물러나라는 탄핵소를 올렸다. 왕이 기뻐했다. 74년부터 민비가 실권을 잡는다. 일본 역시 ‘서향륭성’이 사직하고, ‘대구보리통’이 실권을 잡았다. 뒤에 이등박문이 왜왕 명치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했다.
시아비 대원군을 쫓아낸 민비는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대원군 죽이기에서 민비가 나라 망칠 악수를 둔 것이다. 일본 힘을 업으려고 한 게 나라 망칠 악수였다. 이때 민비가 판서 조영하를 시켜서 일본 외무성 ‘삼산무’(조선파견 육등출사)에게 비밀편지를 보낸다. 대원군과 달리 자기는 일본과 교제할 뜻이 있다는 거였다.
“서로 돕자”는 말로 민비가 손을 내밀어 ‘호상 수호조규’라는 문서가 나온다. 그러나 내용은 ‘호상 수호’가 아니고, ‘일본 탈취 조선 삼항’이었고, ‘조선 삼항 피탈자 일본’이었다. 민비가 속았던 것이다.
외교관이 만나 의논·합의할 일이건만 76년 병자년 정월 11일에 왜병이 강화도에 들이닥쳤다. 왜병은 이미 그 전해에 ‘운양호 사건’을 일으킨바 있다. 왜장 ‘흑전청륭’이 특명전권대신이 되고 왜로 정상형이 부판리대신이 되어 다시 군함을 이끌고서 조선땅에 들어온 것이다. “조선국 대신이 나와서 우리 일본군을 맞이하라. 그러지 않으면, 한양으로 쳐들어 갈 것이니라”라고 했다. ‘호상 수호’하자고 했던 민비 정부는 할말을 잃는다. ‘병자왜란’이라는 역사용어를 발표하지 못한 정부로 되었다.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으니 당연히 ‘왜란’이다. 왜로 청륭과 형이 조선국 접견관(신헌·윤자승)에게 문서를 내놨다. 부산·인천·원산땅에 왜인들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개항()이라는 불평등한 왜식 용어를 써 제 나라를 해롭게 하는 코리안 일본간첩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이병도는 광복 뒤 지은 <한국사 대관>에 “조선이 일본과의 통상으로 인하여 전후 개방한 항구는 인천·부산·원산의 삼관”이라고 했다. 이기백은 ‘강화도 조약’이라고 했다. 1935년생 재팬 ‘미촌수수’는 1976년에 <조선사>라는 책을 냈다. ‘강화도조약 강요’라는 제목 아래 ‘불평등 조약의 강요’, ‘탈취’, ‘무력의 위’에 따라 ‘개국을 강요’했고, ‘계획적 무력도발인 운양호 사건’이라고 기술했다. 일본사람 미촌은 양심이 있는 선비급 역사가였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