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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8 19:25 수정 : 2005.09.09 14:21

도정일/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부시 계급주의적 정책은 뉴올리언스 이재민에게 사회적 재난이고 악이다 악의 세력을 친다는 자가 악의 세력이 되는 역설 사회가 정부보다 못할 때 그 사회는 실패한다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자연의 파괴력에 걸려들면 인간과 그의 문명은 여전히 미물이다. 인간은 아직 폭풍을 잠재울 수 없고 대홍수를 다스리지 못하며 해일과 허리케인을 막지 못한다. 대홍수가 나면 사람들은 집 버리고 도망치거나 물속에 무덤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둑은 옆구리 터지고 전화는 불통이고 자동차는 저 혼자 떠내려간다. 아무리 힘센 기관차도, 한국이 자랑하는 ‘케이티엑스’(KTX)도, 물에 잠긴 도시로는 들어오지 못한다. 비행기는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한 살찐 오리처럼 하늘을 빙빙 돌아야 한다. 탱크도, 대포도, 총칼도 소용없다.

인간을 또 낭패스럽게 하는 것은 자연재난이 선악의 경계 너머에 있다는 사실이다. 2004년 여름 동남아 해안을 덮친 해일은 악을 징벌하러 온 ‘신의 물바가지’가 아니다. 이번 미국의 걸프만 연안 뉴올리언스를 삼킨 허리케인은 무고한 인명들을 앗아갔으되 그 자체가 ‘악의 세력’이랄 수는 없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선악의 이분법에 철저히 무관심하고 하늘은 무심하다. 그 무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심의 확인(“하늘도 참 무심하시지”)뿐이다. 선악구분이 문명의 한 장치라면, 자연은 그 장치까지도 쉽게 박살낸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해서 될까? 인간이 자연을 우습게 아는 것은 분명 오만이다. 그러나 자연의 파괴력 앞에서 인간이 자기방어를 도모하는 것은 오만이 아니다. 그 방어책이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해도 방어의 도모 자체가 죄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피해를 최소화해서 인명을 살리고 고통을 줄일 방법이 있는데도 나태, 무관심, 오판으로 그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되레 오만이고 자연 앞에 건방떨기다. “인간이 계획하면 신이 웃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신이야 웃건 말건 필요한 곳에 필요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 운명의 겸손한 수용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대습격 이후 드러나고 있는 미국의 비참을 보고 있자면 “사회는 어느 때 실패하는가”에 대한 제레드 다이아먼드 교수의 경고(8월26일치 이 칼럼)가 그렇게 적절할 수가 없다. 재난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했을 때, 재난이 발생했는데도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문제 발견 후에도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 해결하고자 하면서도 충분한 해법을 동원하지 못할 때, 사회는 실패한다는 것이 다이아먼드가 저서 <무너짐>에서 내놓았던 경고다. 이 네 가지 경고들은 이번 미국의 경우에 맞춘듯이 들어맞는다.

조지 부시가 허리케인 재난의 가능성을 깔아뭉갠 것이나 재난 수습에 신속 대응하지 못한 것은 부시 정권의 치명적 무능과 실패를 보여준다. “허리케인이 올 줄 누가 알았나?”고 부시는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방 비상관리청(FEMA)은 이미 4년 전 9·11 테러 이전에 미국이 당할 수 있는 세 가지 재난의 하나로 허리케인을 꼽아 백악관에 보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두 가지는 테러와 로스앤젤리스 일대의 지진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라크 침공 준비에 부심했던 부시 정권은 ‘페마’(비상관리청)의 경고를 묵살했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부시는 페마를 국토안보부에 편입시켜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무자격 인사들을 기용해 효율을 마비시켰다. 부시의 첫 페마 청장을 지낸 조지프 올바우는 부시의 정치 측근이었고 다음 청장 마이클 브라운은 전임자의 대학시절 룸메이트다. 전문성과 능력보다 측근과 룸메이트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들은 요즘 미 언론들로부터 ‘희대의 멍텅구리’라는 욕을 먹고 있다.

물에 잠겨 썩어가는 시신들, 먹고 마실 것이 없어서 졸도하는 아녀자들, 속수무책으로 죽어간 병원 위급환자들, 풋볼 경기장에 수용된 이재민의 비참, 약탈과 폭행, 뉴올리언스의 이런 참상을 보면서 지금 미국 스스로는 물론 온 세계가 깜짝 놀라고 있다. 놀라는 이유는 자연재해 그 자체의 크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무관심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시의 무관심에 놀라고 그의 마비에 놀란다. 자연은 무심할지라도 정부가 국민에게 무심할 수는 없다.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대통령의 무감각, 땅을 칠 늑장 대응, 자원 동원의 비효율 앞에 지금 미국 조야가 할 말을 잃고 있다. 재난이 닥쳤을 때 부시는 백악관을 비우고 다른 데 가서 농담하고 있었고 사태발생 72시간이 지나도록 자원 동원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보도되고 있다. 한 예로, 재해지역 인근 해역에는 수천 개의 구급 침대와 하루 10만 갤런의 식수 생산시설을 가진 해군 함정 바따안 호가 핑핑 놀며 정박해 있었다고 한다.


부시의 이런 무관심은 그의 보수주의 정책에, 그의 마비는 인간 고통에 대한 그의 무감각에 직결되어 있다. 뉴올리언스의 참상이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희생자 대부분이 흑인이고 빈곤층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빈자는 보이지 않는다. 부자 세금은 열심히 깎아주면서 빈곤과 환경 문제는 뒷전인 것이 부시 정권이다. 고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무사했던 부자들과는 달리 저지대에 산 죄로 ‘물 먹어야’ 했던 뉴올리언스의 이재민들에게 부시의 계급주의적 인종주의적 정책은 사회적 재난이고 악이다. 악의 세력을 친다고 전쟁을 일으킨 자가 스스로 악의 세력이 되는 역설을 우리는 미국의 비참에서 목격한다. 이 비참은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타산지석이다. 가진 자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나쁜 정부와 무능하고 무감각한 지도자를 두었을 때에도 사회는 실패한다. 사회가 정부보다 못할 때에도 그 사회는 실패한다. 그러므로 사회는 언제나 정부보다 나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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