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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8 19:36 수정 : 2005.09.09 14:21

19세기에 갈과 슈프루츠하임에 의해서 창시된 골상학은 두개골의 형태가 사람들의 능력을 나타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골상학은 즉각 영국 에든버러대학 해부학 교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셰이핀은 이 논쟁이 당시 사회개혁과 신분상승을 꾀하던 부르주아계급과 지배계급의 첨예한 사회적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한길사 간 <지식과 사회의 상>에서

80년대 영국 데이비드 블루어 등 사회구성주의 주창 객관성 중시해온 학문인 자연과학에서 실험자료 검증같은 합리적 인식보다 사회·정치·이데올로기적 요인이 중요한 구실 상대주의 오류 있지만 현대 과학 이해의 징검다리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17. 사회구성주의

‘자연과학은 얼마나 확실하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인가?’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답한다. 그렇게 확실하지도, 그렇게 객관적이지도, 그렇게 보편적이지도 않다고…. 대신 그들은 “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과학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면서 다양한 요소들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 정도의 의미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각한 논쟁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과학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지만 역시 사회적 관계 하에 놓인 과학자들에 의해 생산된다는 면에서, 넓은 의미의 사회적 산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구성주의의 주장은 그 의미가 이보다 훨씬 더 강하다. 자연과학의 내용을 구성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자연 현상에 대한 참된 진술의 여부나 실험 자료로부터의 객관적 검증과 같은 합리적인 인식의 요소들보다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요인들이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곧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인식적 작용 메커니즘보다는 과학자와 과학자 사이의 사회적 메커니즘이 과학지식의 구성에서 (전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면 모르지만,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그것도 객관성을 중시해 온 학문인 자연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은, 20세기 지성사에 하나의 충격적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러한 견해가 나올 수 있었는가? 이 주장은 사실 과학사의 많은 사례 연구들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어떤 과학사학자는 다윈의 진화론이 특별히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하여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당시 사회의 경제적 발전이 경제 내재적 요인만이 아니라 주변의 정치적 환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 정치경제학 이론이 한창 발전하고 있었다는 데서 찾았다.

제도 다르면 연구결과도 달라

한편, 19세기에 발견된 전기 현상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는 과정을 분석한 연구를 보면, 19세기 말 영국의 경우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전통이 강했던 까닭에 이에 기반한 전자기학이 발전한 반면, 이와 달리 수학적이고 이론적인 전통이 강했던 같은 시기의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이에 걸맞은 전혀 다른 전기역학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도적·문화적 환경의 차이가 동일 현상을 다룸에도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과학이론들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과학사학자는 확률적인 설명과 예측만을 제공할 뿐인 비결정론적인 양자역학이 1차 대전 이후 특히 독일 곧 바이마르에서 발흥하게 된 이유를, 패전으로 독일 사람들이 갖게 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당시 물리학자들이 결정론적 물리학에 가졌던 적대감에서 찾았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1970년대 영국 에딘버러대학에서 과학사회학을 연구하던 데이빗 블루어와 배리 반즈는 과학에 관한 사회구성주의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지식이 사회적 요소를 반영한다는 생각은 이미 20세기 전반 칼 만하임과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주창되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그러한 지식에 자연과학도 포함된다고 주장한 것은 1970년대 이들에 의해서다. 이들은 과학지식의 형성과 발전이 사회적 조건에 의해 인과적으로 설명될 뿐 아니라, 뉴턴 과학처럼 진리로 밝혀진 과학지식은 물론 연금술이나 점성술같이 이미 과학이 아닌 것으로 폐기된 지식도 사회적 요인에 의해 그 본질이 동등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사회적 조건 이상으로 과학지식에 더 이상 객관성이니 합리성이니 하는 우월적 권위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의 객관성은 사회적이며, 그 방법론은 상대주의적이다’라는 이들의 모토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른바 ‘스트롱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사회구성주의의 이런 입장은, 그러나 합리적 믿음과 비합리적 믿음의 구분을 없애 상대화하고 합리성 자체를 해체하려는 경향 때문에 많은 비판과 논쟁에 휩싸였다.

이후 사회구성주의는 초기의 문제점들을 일부 보완하면서 ‘완성된 산물로서의 과학지식’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과학 활동’에 좀더 주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특히 실험 행위, 실험을 위한 기구, 그리고 실험실에 관한 새롭고 흥미로운 분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리 콜린즈가 분석한 중력파 논쟁의 사례를 통해 이를 살펴보자. 중력파란 마치 열을 지닌 물체가 빛이라는 파동을 방출하듯이, 무거운 중력을 가진 물체가 방출하는 파동을 일컫는다. 이의 관측은 우주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이나 암흑물질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실험 자료가 된다. 과학사를 통해 보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이의 존재를 처음으로 예측했지만, 실제로 실험을 통한 이의 검출은 계속 실패만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중력파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였고, 일부만이 그 크기가 너무 약해 탐지가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웨버라는 물리학자가 중력파를 발견했다고 공표하였고, 곧바로 열 개의 서로 다른 실험자 그룹이 이를 검증하기 위한 재현 실험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재현 실험에서 중력파는 결국 검출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웨버의 주장이 틀렸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그룹들이 웨버뿐 아니라 상호간에 각기 서로 다른 검출장치를 만들어 실험하였음에도, 어떻게 웨버의 결론이 틀렸다고 공통으로 주장할 수 있었는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구성주의자인 콜린즈는 서로 분명히 다른 실험인데도 이를 동일한 것으로 조정해 가는 어떤 ‘사회적 협상’이 과학자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중력파의 성격, 중력파 실험의 타당성 범위 등에 관한 과학자들 사이의 어떤 ‘합의’가 있었고, 이것이 결국 과학지식의 형성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실험실에 대한 연구 쏟아져

한편, 또 다른 흥미로운 문제도 제기됐다. 중력파를 발견하기 위한 중력파 검출기가 훌륭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것을 통해 중력파를 관측할 때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중력파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신호가 중력파인지 알 수 없어 결과적으로 관측 뒤에도 그 검출기가 잘 작동했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결국 난처한 순환적 상황에 놓인다. ‘실험자의 회귀’라고 불린 이 상황은, 그러나 실제로 실험실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 순환이 무한히 진행되지 않고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콜린즈는 이를 사회적 협상에 의한 멈춤이라고 본다. 실제로 현대 과학에서의 실험 상황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과학 활동에 사회적 협상과 같은 요소들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콜린즈의 생각인 것이다.

이런 사회구성주의의 입장은 오늘날 과학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 과학 사회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현상을 얼마나 잘 설명하고 예측하는가, 실재를 얼마나 잘 그려내는가, 방법은 합리적인가와 같은 주로 내재적인 요소들로 과학의 본질을 논하고 그 발전을 평가했던 전통적인 접근 방식에 대해, 그것이 지나치게 치우친 편협한 시각임을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현대 과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선, 내재적 요소 외에 외재적 요소들을 함께 고려해야 함을 촉구한 셈이 되었다. 또 다른 긍정적인 기여는 그들이 쓴 책―가령 <실험실 생활 : 과학적 사실들의 구성> 또는 <리바이던과 진공펌프 : 홉스, 보일, 실험적 삶>―의 제목들에 잘 나타나듯이, 기존의 관점들이 다루지 않았던 과학자 사회의 특성들, 말하자면 과학 연구 논문이 씌어지는 과정, 실험결과를 놓고 벌어지는 과학자 상호간의 타협 과정, 실험기구의 구실과 중요성, 실험 자료가 하나의 과학적 ‘사실’로 인정되는 과정 등 미시적 차원의 주제들을 새롭게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것들도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중원/서울시립대 교수·과학철학 jwlee@uos.ac.kr
그렇다고 이러한 사회구성주의의 입장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모두 상대화함으로써 어떤 요소가 더 중요한 결정인자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상대주의적 오류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또한 진리와 같은 인식적 요소들이 사회적 요인들로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식적 요소들을 사회적 요소들과 어떻게 통합하여 과학의 총체적인 본질에 다가갈 것인가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 이러한 한계는 있지만, 그러나 사회구성주의가 현대 과학에 관한 좀더 세련되고 역동적인 이해에 도달하도록 참신한 징검다리 노릇을 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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