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성.무구정광다라니경 등 전면 재검토 불가피
14일 존재와 실체가 공개된 경주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는 '판도라 상자'에 비유될 수 있다. 중수기를 포함한 문건은 1966년 10월, 석탑을 해체할 당시에는 전체가 마치 떡처럼 하나로 눌어 붙어 있다가 현재까지 낱장 기준으로 총 110쪽이 분리된 상태다. 석가탑 출토 유물을 일괄로 소장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중수기를 비롯한 이들 문건 중 11세기 무렵에 석가탑을 중수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한 '(불)국사 무구광정탑 중수기'(<佛>國寺无垢光淨塔重修記) 실물 사진 단 1장만을 공개했다. 하지만 중수기 1쪽 분량에 지나지 않는 이 사진에 수록된 내용만으로도 놀라울 만한 대목이 들어가 있다. 이 사진은 '(불)국사 무구광정탑 중수기'(<佛>國寺无垢光淨塔重修記)라는 제목이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수기 첫 대목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문건 첫 줄은 당장 불국사가 개창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신라) 제35대 경덕대왕 시대에 재상이었던 대성 각간이 어찌어찌했으며, (그 뒤를 이은) 혜공대왕이 어떻게 했으며, 그 뒤에 고려 태조 신성대왕과 혜종대왕을 지나 어찌어찌 되어 어디에 이르렀으니 285년이다고 한다. 사진으로 공개된 문건 마지막 구절에 보이는 285년이란 아마도 신라 제35대 경덕왕 시절에 재상이자 각간 벼슬에 있던 김대성이란 사람이 발원해 불국사가 착공된 지 285년이 흘렀다는 의미가 될 듯하다. 박물관 배포 보도자료에 의하면 중수기는 아마도 태평 18년에 석가탑을 중수하면서 그 내력을 담은 기록일 가능성이 농후하다.태평이란 연호는 중국에서는 더러 사용되엄만 이 경우는 요나라에서 사용한 연호가 확실하다. 따라서 그 18년이라면 서기 1038년, 고려 제3대 정종 재위 4년이 된다. 따라서 중수가 이뤄진 1038년에서 285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기 753년이 된다. 이 때는 신라 제35대 경덕왕 재위 12년이 되는 시점이며 당나라 연호로써는 천보 12년이 되는 시점이다. 박물관이 공개한 이 문건은 각각 아래와 위쪽 일부가 훼손되어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대강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그것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대성이 2세 부모에게 효도하다'는 제하로 수록된 불국사 창건 내력과 똑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삼국유사 이야기에는 김대성이 불국사 창건을 발원하고 그것이 완성되기까지 과정과 관련해 두 가지 계통의 기록을 아울러 소개하고 있다. 하나가 향전에서 추린 기록인 반면 다른 한 가지 계통 이야기는 불국사에 전해 내려오는 사찰 기록이라고 삼국유사는 말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중수기는 이 두 가지 기록 중에서도 사중기, 즉, 불국사에 전해지고 있던 사찰 자체 기록을 빼다 박았다. 즉, 삼국유사가 인용한 불국사 기록은 다음과 같다. "경덕왕 때 대상인 대성이 천보 10년(751) 신묘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다. 혜공왕 시대를 거쳐 대력 9년(774) 갑인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했다." 그러면서 전혀 상이한 두 가지 기록을 나열한 다음 삼국유사 찬자는 "어느 쪽이 옮은 지 알 수 없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석가탑 중수기가 말하는 불국사 기공 시점(753년)과 삼국유사에 인용된 시점(751년)이 2년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을 뿐더러, 그 골자는 서로 빼다 박았다. 실상 똑같은 기록이라고 봐야 한다. 삼국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삼국사기보다도 편찬연대가 무려 100년이나 빠른 1038년에 작성됐다고 생각되는 중수기가 공개되고, 또 거기에 수록된 내용이 삼국유사에 인용된 두 가지 불국사 창건 연기 중에서도 사중기와 흡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적어도 이제 불국사 역사는 여기에서 출발점을 삼아야 하는 시점에 우리는 도달했다. 하기야 삼국유사 두 가지 기록을 대비할 때 향전에서 뽑았다는 기록은 대성이 죽었다가 다른 고관대작 집 아들로 환생했다는 따위의 지괴류 소설로 일관하고 있어 이를 액면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아가 중수기가 보충됨으로써 불국사 창건 발원자인 김대성에 대해서도 이제는 좀 더 확실한 정보를 구축하게 됐다. 그는 경덕왕 때에 관위(관리의 등급)가 이미 각간이었고 관직은 상, 즉, 재상이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이런 권력과 그에 따른 튼실한 재력을 바탕으로 김대성은 개인 재산을 쏟아부어가면서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 창건에 총력을 투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김대성은 두 사찰을 토함산에 지어야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뭐라 확언할 만한 증거는 없다. 다만 당시 토함산은 중국의 태산에 대비되어 신라의 오악 중에서도 동쪽에 있다 해서 동악으로 신성시되었으며, 나아가 그곳에 주석하는 최고신이 석탈해가 신격화한 동악대신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대성은 지금의 경주 평야 적당한 곳을 골라 거찰을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당시 경주 시내는 지금의 서울 강남을 방불할 만큼 급격한 도시팽창 때문에 설혹 경주 평야에 절을 짖고 싶었다 해도 그럴 만한 공간은 없었을 것이다. 혹여 이번에 발굴된 중수기 등의 석가탑 문건에 이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대목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아가 이번 중수기가 고려초에 작성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또 하나의 거창하고도 골치아픈 문제에 봉착하게 됐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966년 출토 이듬해인 1967년 9월 16일, 국보 126-6호로 지정된 이 다라니경은 팔만대장경판과 금속인쇄술, 한글과 함께 한국이 세계에 대해 한국적 자존심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그 가장 주된 근거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라는 데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은 적지 않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공격은 집요하다. 당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세계의 대국이요 문명 선진국인 중국으로서는 변방 신라가 목판인쇄를 했다는 사실을 용납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770년 무렵에 간행되었다는 '백만탑다라니'를 앞세우는 일본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한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1966년에 함께 출토된 이번 중수기가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그 제작 연대 또한 동반 하락할 여지를 남겨두게 되었다. 이 다라니경이 8세기말 제작되었다는 근거는 실상 석가탑은 창건 이후 단 한 번도 수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이에 더해 그 경문에서 중국역사상 전무후무한 측천무후(. 재위 685-704년)가 기존 문자를 혁파하고 새로 만들어 사용한 이른바 '측천무후자'가 빈번히 발견된다는 데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중수기와 함께 새로이 존재가 보고된 유물 목록에 '다라니경'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다라니경 8세기말 제작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영 심상치 않다. 박물관은 14일, 석가탑 중수기 발견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그와 함께 당시 석가탑 중수 상황과 전말을 기록한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라는 제목의 또 다른 문건과 다라니경으로 추정되는 사경(. 붓으로베껴 옮겨 적은 불경) 조각 등도 아울러 확인됐다고 말했다. '다라니경으로 추정되는 사경 조각'이란 이 한 마디는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이라고 우리가 자랑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어디로 몰아갈지 모르는 '럭비공'이다. 하지만 총 110쪽에 이르는 이들 문건에는 이와 같은 문제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짐작할 수도 없는 무수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음에는 틀림 없을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학계 일부에서 통일신라가 아니라 고려시대 분위기가 많이 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던 다른 출토품들 또한 제작시기와 관련해 철저하고도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번에 공개된 중수기 이하 석가탑 출토 문건들은 '판도라의 상자'다. 김태식 기자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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