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9.15 16:27 수정 : 2005.09.16 14:09

추석빔과 먹거리가 풍성한 한가위는 아이들에게도 손꼽아 기다리는 명절이었다. 2003년 9월 8일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서 열린 ‘한가위 차례예절 체험행사’에서 아이들이 절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열넷에 할아버지는 결혼해 살림내고 산에 밤을 다섯 말이나 심으셨다 “끼니도 못챙기면서…” 동네사람들은 비웃었다 십년이 됐을 때 사람들은 놀라기 시작했다 30년이 지나자 동네 최고의 소득을 올렸다 아버지는 성묘길에 그 얘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밤나무

한가위 특집/달빛 에세이

“엄마, 몇 밤만 자면 추석이야?”

요즘 아이들은 명절이 다가와도 이런 걸 묻지 않는다. 우리집의 두 녀석도 그랬다. 꼭 명절이 아니더라도 입고 먹는 것에 아쉬운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릴 때는 그 말을 한 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어른에게 물었다.

추석이든 설이든 명절의 가장 큰 준비는 먹는 준비와 입는 준비였다. 요즘이야 철마다 수시로 옷을 사 입히니 추석이라고 따로 그런 것에 신경 쓸 일도 없지만, 우리 어린 시절엔 아이들도 은근히 기대하고 어른들도 암만 살림이 어려워도 빼놓지 않고 큰 맘 쓰고 넘어간 것이 ‘추석빔’이었다. 강릉지역에서는 설날 단오날과 함께 형제들 모두 새 옷을 받아 입는 날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전날 저녁까지도 새 옷을 사온 내색을 않다가 추석날 아침 새 옷을 꺼내주어 우리의 기쁨을 더욱 크게 해주었다.

그런 명절이 다가오면 음식을 장만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게 바로 가마솥이었다. 평소엔 짚을 썰어 쇠죽이나 끓이던 가마솥에 송편과 절편을 찌고, 고기곰국을 미리 끓여놓는다. 첫새벽에 일어나 쇠죽 한번 끓여 퍼낸 다음 오후 늦게까지 그 가마솥을 이용해 다른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떡을 찌는 일이야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지만, 집앞 문중산에 모셔져 있는 조상들 산소에 성묘를 오는 친척들에게 대접할 곰국을 미리 끓이는 일은 전날 하루 종일 걸린다.

어른들만 이렇게 명절 준비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도 추석 전에 차례상에 올릴 과일을 우리 손으로 미리 따 준비한다. 요즘은 9월 초에 이미 노랗게 익은 단감이 시장에 나오지만, 우리집 마당가와 밭가에 서 있는 그 많은 감나무들 가운데 어느 나무도 추석 전에 노랗게 익는 감이 없었다. 그래도 차례상엔 감을 써야 하고, 그러면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도 제일 알이 굵고 노릇노릇해지기 시작하는 감을 따온다. 그러면 어머니가 그 감들을 단지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이틀쯤 침을 들여 단감을 만든다. 차례상에 올릴 밤 역시 예전에 할아버지가 심은 밤나무 산의 그 많고 많은 나무들 가운데 어느 비탈의 어느 나무가 가장 알이 굵고 빨리 익는지 우리가 먼저 알고 장대와 소쿠리를 들고 가 그것을 따온다.


어려워도 추석빔 잊지않던 부모님

그렇게 어른도 아이들도 풍성한 마음으로 명절을 맞이한다. 하루하루 들판을 더욱 노랗게 황금색으로 물들고, 밤이면 하늘의 달은 더욱 포동포동 살이 쪄가는 가운데 바로 내일 추석이 다가오는 것이다. 전날 어른들은 음식준비로 더욱 바쁘고, 아이들은 연신 동구밖으로 들락날락하며 객지에 나가 있다가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형과 누나와 삼촌과 고모를 기다린다.

누구 집 자손이든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오는 아들딸들은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온다. 가족들의 옷이며 새로 나온 캐시미어 담요며 전기밥통이며 전기요를 사 들고 걸음걸이도 씩씩하게 동네에 들어선다. 어떤 형과 어떤 아저씨는 시내에서부터 폼나게 택시를 타고 들어온다. 이때에도 금의환향 카퍼레이드를 하듯 자동차 유리창을 제일 아래까지 내리고 오가는 동네사람들에게 연신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묻는다. 그런 아저씨들과 형들과 누나들은 서울이든 부산이든 그들이 떠난 길이 아무리 멀다 해도 다들 해 떨어지기 전에 마을 안으로 들어온다.

달 밝은 밤, 길가에 선 나무 그림자를 골라 밟으며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 듯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매년 정해져 있다. 남들은 모두 두 손이 부족하게 선물을 사들고 고향을 찾아오는데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빈손으로 고향을 찾는 젊은이들은 그 빈손이 부끄러워 늘 한밤중에 동네 개들을 긴장시키며 마을로 들어온다.

한때 문학 백수였던 시절 나도 그런 축이었고, 남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해서 서른 몇 살까지 대학의 시간강사를 하던 동네 후배도 그런 축이었다. 명절 전날 밤이기도 하지만, 그런 아들의 쓸쓸한 귀향을 위해 어머니는 우리집 마당만이라도 더욱 밝게 외등을 밝혀두었다.

또 더러는 이렇게 늦은 밤에도 고향집에 갈 처지가 못 되어 객지에서 혼자 쓸쓸하게 추석 명절을 보내는 아들딸들도 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그 집 어머니는 낮부터 대여섯 번은 더 길게 목을 빼들고 동구 밖까지 나왔다가 들어간다. 그리고 모두 잠든 깊은 밤, 그 집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마당가로 나와 달을 보고 기도한다.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딸이 내일이 추석이라는 걸 알기나 하는지, 어디에서 따뜻한 밥이나 한 끼 제대로 먹고 있는지, 객지에서 아프지 말고 부디 자리 잘 잡아 내년 추석에는 꼭 다른 집 아들과 함께 올 수 있게 해달라고 달님에게 빌고 또 비는 것이다.

스무명 넘는 대가족 한자리에

그렇게 아침이 밝아 추석날이 되면, 우리 어린 시절 성묘는 마치 집안의 가을 소풍과도 같았다. 도포 차림에 갓을 쓰신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아버지와 다섯 명이나 되는 당숙들, 또 우리 사형제와 세 명의 재종형제들, 성묘 제수거리를 담은 함지를 머리에 인 어머니와 당숙모, 어림잡아도 열다섯 명의 식구가 성묫길에 나선다.

성묘를 마치곤 산소 가에서 점심 겸 음복을 하고, 그 산 아래 밤나무 숲에서 밤을 따온다. 우리는 밤보다 다래와 머루에 관심이 더 많다. 이건 어른들보다 우리가 있는 곳을 더 잘 안다. 여름 내내 소를 먹이러 다니며 봐 둔 게 있기 때문이다. 다래는 처음 나무에서 딸 때엔 비려서 먹을 수가 없다. 그것을 따뜻한 방안에 하루쯤 묵혀두면 저절로 말랑말랑해지며 단맛이 난다.

이렇게 생각만 해도 저절로 신이 나는 그 시절로부터 꼭 한 세대가 지났다.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는 당신들이 성묘를 다니던 선산에 가 누우시고,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추석이 되면 어김없이 시골집에 모인다. 도시 생활을 한 지 25년도 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추석 때 집에 안 내려갔던 적이 없다. 그것은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명절이면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사형제, 또 한 집안에서 형제처럼 자란 육촌 형님까지 스무 명도 넘는 대가족이 2박3일, 때로는 3박4일 연휴 시작부터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시골집에 머문다. 바로 옆에 있는 작은집도 열다섯 명이 넘게 늘어난 자손들이 추석날 아침 너른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제 아버지가 예전의 할아버지만큼이나 늙으신 모습으로 도포차림에 갓을 쓰고, 큰집 작은집의 대부대를 이끌고 성묘를 가신다. 먼 곳의 산소는 오가는 성묫길만 삼십리 가까이 된다. 그런데도 어느 산소 하나 빼놓지 않고 성묘를 다닌다. 먼 곳은 자동차로 움직이고 가까운 산은 걸어서 간다.

어린 날 우리를 데리고 성묘를 다니시던 할아버지 산소는 밤나무 산을 지나서 간다. 할아버지는 열네 살 때 결혼을 하여 살림을 나신 다음 그 산에 밤을 다섯 말이나 심으셨다고 한다. 그때 막 살림을 났을 때는 무척 가난하여 먹을 것도 제대로 없을 때였는데, 그래서 동네 사람들 모두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먹으면서 산에 밤 다섯 말을 심는 어린 새신랑을 비웃다고 한다.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오년이 지날 때에도 사람들은 비웃었다고 한다. 그러나 밤을 심은 지 꼭 십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놀라기 시작했다. 20년이 되고 30년이 되었을 땐 그 산에서 딴 밤농사만도 동네에서 가장 큰 부농의 한 해 농사보다 더 큰 수확을 올렸다고 했다.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밤나무 산으로 성묘를 가며 아버지는 집안의 크고 작은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성묘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그 산에서 밤을 줍는다. 살아가며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 이보다 더 큰 공부는 또 어디 있을까. 그렇게 할아버지는 밤나무 산에서 나무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언제나 보답보다 받는 사랑 더커

명절을 마치고 돌아올 때 시골집 마당 안의 풍경도 요란하다. 어머니와 형수님이 싸주시는 갖가지 추석음식과 미리 짜놓은 참기름, 여름 내내 마당에 펼쳐 말린 태양초로 빻은 고춧가루, 꿀 한 통, 무, 배추, 감자, 가짓수를 알 수 없는 밑반찬, 올망졸망한 봉지마다 가득 든 각종 잡곡, 그리고 어김없이 자동차 트렁크 한 구석을 채우고 있는 집 앞 논의 쌀 한 포대. 그 쌀의 의미가 바로 이 집 아들이라는 뜻이다.

풀어놓으면 참 많기도 하다. 그런데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더 싸 주시지 못해 자동차 트렁크의 빈 자리가 없나 살피신다. 고향의 형님 역시 하나라도 더 실어주기 위해 그 짐들을 이렇게 실어보고 저렇게 실어본다. 그래서 겨우 한 공간 생기면 거기에 또 새로운 짐 하나를 채워주신다.

언제나 내가 보답하는 것보다 받는 사랑이 더 크다. 갈 때마다 이제는 좀 더 자주 와야지 하면서도 그 생각 역시 고향 집 마당에 섰을 때뿐이다. 처음 내가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났던 자리가 그곳이고, 언젠가 그 길을 마무리하는 자리 역시 바로 그곳일 텐데도 그렇다. 객지에 나가 있어도 근본은 바로 저 마당 안의 사람임을 생각하며 앞으로는 더 바르게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늘 옳은 생각 속에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옛말에도 그랬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고. 우리가 사는 세상 모든 모습이 그랬으면 좋겠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가졌던 따뜻한 마음 그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길이 밀리더라도 짜증내지 말고 길 위의 이웃들을 내 형제처럼 바라보며 다녀와야겠다. 나도 한때는 늦은 밤, 길가에 선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몰래 숨어들 듯 고향에 다녔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 시절에 비한다면 지금 조금 여유로워진 내가 예전의 나를 대하듯 그렇게, 그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이웃들을 대해야겠다. 이순원/소설가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