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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15 17:50 수정 : 2005.09.16 14:08

역사로 보는 한주

1985년 9월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주요 5개국(G5)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들이 모였다. 미국이 주도한 이 모임 참가자들은 미국의 과도한 무역 불균형, 특히 대일 무역적자 해소 등을 위해 기존의 달러 강세·엔 약세 기조를 달러 약세·엔 강세로 바꾸는 협조개입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다. 이 사실상의 강제 조처에 따라 당시 1달러당 240엔 안팎이던 엔 가치는 그 다음날부터 급등하기 시작해 1년여 뒤에는 달러당 120엔대에 거래됐다. 엔에 대한 달러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 직전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이 채무국으로 전락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세계최대의 채권국으로 등장했다. 일본은 연간 350억달러에 이르는 경상흑자로 1970년대의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며 일본경계론을 폈다. <비즈니스위크>도 법석을 떨었다. “자동차, 전자부품, 기타 수백가지 상품 수출로 남아돌만큼 돈을 번 일본은 급속히 세계의 물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의 OPEC과는 달리 일본은 그 부를 금융제국건설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플라자 합의 뒤 일본은 수출 타격 등에 따른 불황 공포로 바짝 긴장했으나 오히려 전대미문의 대호황기로 진입했다. 미국으로 가던 돈이 일본쪽으로 쏠렸고, 수출업계를 지원하기 위한 일본의 저금리 정책은 연쇄적인 부동산 및 주식 투기 붐을 불러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까지 엄청난 ‘거품경기’를 몰고 왔다. 엔 강세, 도쿄도 땅값만으로 미국 전체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땅값 폭등으로 해외여행 붐이 일고 록펠러센터, 유니버설 등 미국 재산 사들이기, 공장의 해외이전이 급속도로 진행됐다. 은행은 부동산을 담보로 돈 빌려주기에 바빴다.

그러나 실물경제의 성장을 동반하지 않은 이런 투기경제의 거품은 한번 꺼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돼 90년대 초부터 10여년간 계속된 ‘헤이세이 장기불황’으로 귀결됐다. ‘세계 넘버원 국가 일본’은 졸지에 ‘세계경제의 문제아’로 전락했고, 금융개방도 강요당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플라자 합의’로 상징되는 미국의 움직임을 ‘앵글로색슨의 음모’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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