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15 18:17
수정 : 2006.02.22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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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환상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도서출판 동아시아. 2004. 값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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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이책
어린 시절,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마냥 신기했다. 둥그렇게 쌓아 올린 돌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발가락 끝 힘까지 두 눈에 죄다 끌어 모아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어둑한 그곳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두레박을 타고 내려가 볼까. 아니야, 줄이 끊어질지도 몰라. 우물 밑까지 닿는 기다란 사다리는 없을까. 아니야, 한번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올지도 몰라.
호기심. 시대의 처음에서 새 세계의 문을 두드렸던 사상가들, 미지의 대륙을 찾아 거친 풍랑과 맞섰을 탐험가들, 인류의 삶을 한순간에 바꾼 위대한 발명가들. 그들의 가슴에서는 내 유년의 호기심처럼 쉼 없이 열정을 부채질하고 있었을 테다.
나카자와 신이치(中澤新一)도 그런 사람이다. 책 만드는 내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우물 속 세상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그의 강의록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인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는 현대 사회가 총력을 기울여 감추려는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인류의 철학적 사고의 원형을 파헤친 <신화, 인류 최고(最古)의 철학>, 국가의 탄생 과정과 그로 인해 야기된 ‘야만’을 해부한 <곰에서 왕으로>에 이어, 다시 한 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책은 화폐의 탄생과 그 인류사적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시간을 거스르고 바다와 대륙을 건너가며, 우리를 동과 서, 고와 금의 세계로 안내한다. 인류 미술의 시초로 거론되는 라스코 동굴을 둘러보는 재미도 남다르다. 고고학자의 시선으로 벽화들을 꼼꼼히 살피다 보면, 부와 생명을 낳는 자의 능력에 대한 찬양을 넘어 죽음과 소멸을 둘러싼 사고가 어떻게 서로 짝을 이루는지 알게 된다. 바그너의 오페라로 유명한 <니벨룽의 반지>도 감상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대악극을 통해 왜 자본주의 이전의 유럽에 ‘숨겨진 보물’ 이야기가 많이 발견되는지, 자본주의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구수하게 들려준다.
압권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포틀래치’다. 신임 수장을 축하하고, 세상을 떠난 선임 수장의 덕을 기리는 일종의 제의인 포틀래치는 원주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환상을 품고 살았는지 보여준다. 이 제의를 주최하는 사람은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엄청난 양의 선물을 마련했다. 상대방 역시 그 답례로 배포 큰 선물을 준비했다. 그들은 만물에는 영력이 깃들어 있어 교환이나 증여가 이루어지면 영력도 함께 이동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답례를 하지 않을 경우, 영력의 유동이 정지해버리게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사랑을 ‘물(物)’에 담았던 그들. 이 지점에서 왜 책의 제목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개념인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인지 무릎을 치게 된다. 욕망과 집착이 사랑의 자리를 가로채, ‘물’의 자연스럽고 원활한 순환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 현대 자본주의, 그리고 빈부의 격차로 인해 야기되는 온갖 사회적 문제를 떠올리면 포틀래치는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집요하게 탐구하여 밝혀내는 나카자와 신이치. 그는 때로는 적당히 체념하고, 때로는 적당히 외면하던 내게 ‘물’의 배타적 소유는 이 세계의 건강한 운행을 저해한다는 일종의 우주적인 책임감을 상기시켜주었다. 김영주/편집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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