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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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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의 출판전망대
독서와 책의 위기가 벌어지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문맹국가가 아닌 인쇄된 텍스트(책)의 생산과 유통이 가장 활발하고 사회적으로 제일 많이 보급되고 있는 지역이다. 대표적인 곳이 책과 인쇄물 생산에서 세계 1위인 미국이다. 미국의 도시 지역에서는 문맹률이 증가하고 있고, 공립교육기관에 다니는 중고생과 대학생들의 지적 수준이 계속 낮아지고 있어 독서와 책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대중음악비평가 로버트 패티슨은 그 원인을 낮은 수준의 대중교육과 엘리트 교육을 기술적으로 분리하려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교육제도에서 찾는다. 엘리트 교육은 비싼 학비에 최고의 시설을 갖춘 대학에서 공적으로 인정된 문화와 전통적인 언어습관에 대한 절대적 존중에 기초하여 시행되지만 ‘권력’과 ‘비즈니스’를 위한 지식 교육에 집중돼 있다. 젊은이 문화 또한 매스미디어와 전통적인 방식에 의해 조율된 두 문화가 서로 확실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매스미디어에 조율된 문화는 록 음악과 영화, 텔레비전, 전자게임 등을 선호하고 독서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로맨스나 추리, 만화 등과 같은 인포테인먼트에 관심이 한정될 뿐이다. 반면에 전통적인 문화는 독서에 기초를 두고 질 높은 연극, 영화, 클래식 음악을 기본으로 하지만 매스미디어의 새로운 기술은 보완적으로밖에 이용하지 않는다. 이런 분석은 이미 1960년대 이후에 나왔으며 그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문맹퇴치를 위한 독서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해왔다. 하지만 미국이 처한 실질적 위기는 높아지는 문맹률이 아니라, 이른바 확신을 갖고 열심히 독서하며 여론을 형성하는, ‘질 높은’ 독자들의 독서가 감소하는 독서의 ‘품질’에 있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한 비공식 통계로는 2억7천만명의 미국 인구 중에 ‘질 좋은’ 독자는 고작 1만5천명 안팎이라 한다.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양질의 책은 읽지 않고 있어 전방위적인 교양의 저하라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에 직면하여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위기에 대한 출판사들의 대응은 매우 단세포적이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가며 인기 작가의 작품 확보, 인스턴트 출판물에 집중하고, 스테디한 고전의 ‘중복’ 출판 등을 통해 오로지 할인 경쟁으로 승부를 내려는 것이다. 지금 새삼스럽게 미국의 ‘실패담’을 거론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런 비판 없이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맹률이 세계 최저라는 우리나라이지만 ‘질 좋은’ 독자는 고작 3천명 안팎에 불과하다. 그러니 신문에 양서라고 대대적으로 소개돼봤자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마저 쉽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질 좋은’ 독자의 욕구에 맞는 다양한 책을 생산할 수 있는 구조의 원천적 회복이다. 그 시발점이 학교도서관의 활성화로 어린 시절부터 모든 계층이 자발적으로 책을 골라 읽는 문화를 조성해 주는 평등교육의 실천임은 불문가지다. 최근 교육인적자원부는 추천도서를 선정해, 그것을 읽게 하여 대학입시에 반영하는 독서이력철 제도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이런 수준 이하의 ‘엘리트 교육’이야말로 아이들을 책에서 원천적으로 멀리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 자체를 질곡 속으로 몰아넣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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