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의 역사
이종욱 지음. 김영사 펴냄. 2만8900원 |
일본의 광개토왕비 탁본 해석·중국 동북공정… ‘현재’라는 색안경 끼고 역사를 정치적 도구로 삼는 동북아 4국의 아전인수 주장에 따끔한 일침 식민사학 못버리고 중국책 높게치는 학자들 비판 “한국의 발해사 편입도 부당한 역사정복” 주장
고질적인 지역주의 병폐가 첨예한 정치문제로 떠올랐을 때 현실 지역구도의 뿌리를 고대 삼국간 항쟁기까지 거슬러올라가서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영·호남의 갈등을 1500여년 전 신라·백제 대결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바라본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개발독재 시절 이전까지의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이해에 맞춰 과거를 마음대로 재단한 왜곡과 아전인수의 전형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다. 고대 정복왕조들에게 과연 오늘날과 같은 민족이나 민족주의 또는 국가 개념이 존재했을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심지어 그들간에 같은 말을 썼는지, 통역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했을지조차 매우 의심스럽다. 왕족과 귀족이 주도한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고대 정복국가들간의 싸움을 지금의 민족·국가 개념으로 파악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그렇다면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쳐서 무너뜨리는 반민족적 만행을 저질렀다는 식의 주장은, 한마디로 줄이면 ‘말 안되는 얘기’다. 게다가 더 말이 안되는 것은, 몇세대만 올라가도 자신의 조상들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와 지금의 고향땅에 정착했는지도 모를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을 고대의 신라나 백제, 고구려 그 어느쪽 주민과 동일시하고 그들의 입장이 돼 열을 올린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은 이 ‘말 안되는 얘기’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게 인간세상이다. 지금 진행중인 한-일간, 중-일간, 한-중간의 이른바 ‘역사전쟁’이라는 것이 그 전형적인 사례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민족적 정통성문제를 둘러싼 남-북한간의 갈등과 긴장속에서도 그 자취는 뚜렷하다. 지역주의마저 삼국시대 유물로 왜곡 일본의 주류 가운데 상당수는 중국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에 대한 의심스럽기 짝이없는 해석을 근거로, 자국이 동아시아의 역사적 맹주였으며 한반도는 독자적인 역사를 지니지 못한 ‘문화전달 통로’에 지나지 않았고, 고대 야마토가 지배했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연고권 주장은 당연한 것이라고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알다시피 이른바 ‘동북공정’을 통해 과거 한번도 자국역사에 편입한 적이 없는 고구려사를, 오직 그 무대가 현재의 중국 영토 위였다는 점을 근거로 자국역사의 일부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조선-북한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한국사의 정통이라 주장해온 북한은 여전히 나·당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멸망을 반민족적 배신행위로 간주하면서 고구려를 높이고 신라를 깎아내린다. 고조선-삼국-대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한국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정통으로 주장하는 남한은 당연히 그에 대립한다.
|
평양 천도 뒤 만개한 고구려 문화의 성숙미를 보여주는 강서대묘 벽화속의 사신도 중 청룡(위)과 현무
|
문제의 광개토왕비 탁본 중 신묘년 조의 기록,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었다.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서 (또는 신묘년 이래) 백제, △△, 신라를 쳐서 그 신민으로 삼았다’는 부분에 대해 일본인 연구자들은 원문 그대로를 역사적 사실이라 주장해왔고, 한국인 연구자들은 이들 문장에서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돼 있다며 고구려가 바다 건너 왜를 쳐부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런 해석 둘 다 부정한다. 그는 신묘년보다 불과 20년 앞선 371년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군과의 평양전투에서 전사한 사실 등을 지적하면서 비석에서 백제를 백잔이라 폄훼하는 등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고 왜의 존재를 부각시킨 문제의 부분은 그 사실을 기록에 넣고 싶지 않았던 고구려 왕실의 의도적인 비틀기로 해석해야 한다며 여러 방증자료들을 제시한다. 건국신화속의 주몽은 한사람이 아니라 여러대에 걸친 왕들의 업적을 그 한사람에 집약한 것일 가능성이 크고 그의 아들로 기록된 유리왕도 몇대 뒤의 왕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계루부 등 5부 연맹체설에 대해서도 고구려는 제후국들을 거느린 일종의 제국이었다며, 폐기돼야 할 ‘부 체제설’을 2002년부터 사용된 고교 <국사>에 싣고 있는 점을 비판한다. “20세기에 만든 역사는 버려라” 중국쪽 주장에 대해 이 교수는 고구려사가 중국 정사인 25사에 들어 있지 않고 오직 열전에서 고구려와의 관계, 습속, 제도, 산물에 대해서만 쓰고 있을 뿐이라며, 당시 상황에서 위나 수·당과의 조공관계는 오히려 고구려가 정복당하지 않은 독립국이요 외국이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고 지적한다. 이 교수가 최근 남북한이 모두 중시하고 있는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데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말갈족의 발해사나 여진족의 금사를 국사에 넣자는 얘기는 중국이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에 넣자는 것과 같은 부당한 ‘역사정복’이라는 그의 주장은 논란을 부를 소지가 있어 보인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