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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15 18:42 수정 : 2005.09.16 14:06

말글찻집

1876년 병자년 2월13일부터 부산·인천·원산에 왜인들이 살게 되었다. 1차 겁탈문서에서 그렇게 됐다. 7월에 이르러 부산·동래땅을 더 많이 빼앗으려는 문서를 내어놓는다.

“부산항과 동래에서 일본인이 다니는 범위는 부두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10리로 한다. 일본인들은 조선땅과 생산물을 사고팔 수 있다.”

여기에 도장 찍은 날이 7월6일이었다. 그 이름이 ‘수호조규 부록’이다. 배달겨레는 이를 ‘병자 7월 왜란 1’이라고 한 뒤 ‘부산 동래 20리땅 겁탈문서’라 부르는 게 좋겠다.

민비 시대 2년째인 1876년 병자년은 나라땅을 재팬에 빼앗기는 첫단추로 되었다. 민비가 대원군을 죽이려던 계략에서 던진 구원책이 나라땅을 잃게 한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조선땅에 저들 사람을 옮겨 심을() 발판을 만들었던 쾌거였다. 광복 뒤 부왜파들은 땅 빼앗기는 조약을 읽어보지도 아니하고 ‘개항’이라 하고, 대원군이 ‘쇄국했다’고 지껄여 왔다. 쇄()란 자물통인데, ‘나라에 자물통’은 억지소리다.

7월6일 같은날 일본이 두 문서를 내놓고 협박했다. 이등박문이 일본인 옮겨 심을 땅을 확보해 놓고 서둘렀던 것이 이땅에 일본말을 심는 일이었다. 그 ‘일본말 강요 약조’가 바로 ‘병자 7월 왜란 2’였다.

“외교문서는 모두 일본말로 쓸 것이며,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의 배는 항구세를 내지 않는다.” 항구세를 들먹이지만 속셈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일본말을 배우게 함이었다. 이등박문 정부가 내어놓은 그 문서가 ‘무역규칙’이었다. 일본 정부에 식민부()와 식민장관이 생겼다. 일본인은 식()이라는 글자를 부룰(불릴) 증()으로 쓴 것이다. 득을 보는 쪽은 식민()이, 해를 입는 조선으로는 식민()이 마땅하다. ‘식민사관’이라는 말을 하는 코리안이 있다. 애매한 말을 하면 바보가 된다. ‘침략사관’이라 해야 주체가 살아난다. 박문이 런던 유학생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함에서 ‘말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을 것을 런던에서 배운 것이다. 려증동/경상대 교수·배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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