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는 당대 소피스트의 ‘지존’으로서 명성과 부를 누린 프로타고라스와 거리의 철학자로서 젊은이를 가르쳤던 소크라테스가 주로 교육을 주제로 나눈, 토론 달인들의 대화다. 그림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소재로 그린 라파엘로의 작품 <아테네 학당>(1510년). 하늘 향해 손을 치켜든 플라톤과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인다.
|
“덕은 교육 가능하다”는 프로타고라스 “가르칠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비수같은 비판 깊어진 논리싸움은 ‘논리의 덫’에 걸리고 둘의 견해도 뜻하지 않게 바뀌어 버리는데…
고전 다시읽기/플라톤 ‘프로타고라스’ 플라톤이 쓴 대화편들에서 주인공은 항상 스승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현대인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그의 대화 상대자들 또한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들이었다. 플라톤은 유명인들의 이름값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작가였다. 하품 나오는 내용이라도 명사들끼리 오갔던 말이라 하면 귀가 솔깃해지는 법이다. 이 점은 오늘 소개할 <프로타고라스>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로타고라스는 요샛말로 한다면 ‘고액 구술 과외’를 통해 명성과 부를 얻었던 사람으로 당대 소피스트들 중의 ‘지존’이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로서 보수 없이 젊은이들을 가르쳤던 사람이다. 교육자로서 입지가 완전히 다른 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둘 사이의 논쟁을 다룬 <프로타고라스>의 주된 테마 역시 ‘교육’이다. <프로타고라스>는 히포크라테스라는 젊은이가 흥분하여 소크라테스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때는 꼭두새벽, 소크라테스는 놀라 왜 그러냐고 묻는다. 젊은이는 프로타고라스가 지금 아테네에 와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 자신을 그에게 데려가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다리를 놓아 달란다. 고대 그리스에서의 유명 소피스트들의 존재는 지금의 고액 논술 강사, 변호사, 연예인 등등을 합쳐놓은 것과 같았다. 일종의 ‘에듀테이너(edutainer)’들인 셈이다. 소피스트들끼리의 논쟁은 좋은 구경거리여서 수많은 관중들이 모여 열띤 응원을 벌였단다. 나아가 민주사회에서 좋은 말주변은 큰 무기다. 남을 잘 설득할 수 있으면 관직에 나가기도 좋고 재판에서 이기기도 쉽다. 소피스트란 바로 말 잘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히포크라테스가 인기 절정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에게 안달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달뜬 히포크라테스를 단번에 진정시켜버린다. 의사에게서는 의술을 배우고 조각가에게서는 조각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면 소피스트들에게서는 도대체 무엇을 배우는가? 말을 잘하는 법? 무엇에 대해 말을 잘하는 법인가? 돈을 싸들고 프로타고라스를 찾아가기 전에 먼저 그네들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면밀히 검토해 봐야 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는 한결 차분해진 히포크라테스를 데리고 아테네의 최고 부자였던 칼리아스의 집으로 간다. 그 곳은 프로타고라스의 방문을 맞아 온갖 유명인사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대기업 초청 프로타고라스 특별 학술 세미나’를 열고 있었던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우여곡절 끝에 히포크라테스와 함께 프로타고라스와 ‘교육상담’을 시작한다. 그대는 이 젊은이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프로타고라스는 명쾌한 답변을 준다. 나랏일이나 집안을 다스리는 기술(techne)과 덕(德:arete)을 자신에게 배울 수 있다고 말이다.소피스트는 일종의 ‘에듀테이터’ 이에 소크라테스는 의외의 반문을 던진다. 프로타고라스가 가르친다는 덕은 사실 누구도 가르칠 수 없는 것 아닌가? 아테네 의회를 볼 때 이 점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선박 제조나 건축에 관한 일을 논의할 때면 해당 분야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하지만 일반적인 정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상인이건 신발 제조업자건 누구나 정치에 대해서는 다 일가견이 있는 듯싶다. 나아가 그네들의 견해는 모두 다 소중한 ‘국민의 소리’로 존중 받는다. 그렇다면 정치 기술은 선박제조나 건축 일처럼 전문적인 가르침을 받아서 생기는 게 아니지 않는가? 또한 제 아무리 뛰어난 정치가라 해도 자신이 갖춘 덕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다.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라 해도 자기 아들조차도 훌륭하고 덕스러운 사람으로 만들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 점은 명확하다. 프로타고라스는 비판에 흔들리기는커녕, 명성에 걸맞은 노련함으로 소크라테스의 말을 단숨에 뒤집어 버린다. 난쟁이나 태생적으로 허약한 사람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비난할 수는 없다. 이는 노력으로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正義:dike)와 절제, 경건 같은 시민의 기본적인 덕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는 서슴없는 질책이 날아든다. 이는 개인의 덕스러움은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모국어를 자연스레 체득하듯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덕스러움을 교육받으며 몸에 익히고 있다. 이와 같이 덕은 누구나 가르칠 수 있다. 그런데 똑같이 가르침을 준다고 해도 풋내기 교사와 베테랑 교육자가 같을 리는 없다. 프로타고라스 자신은 이 모든 덕스러움을 가르치는 데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따라서 자신이 받는 높은 수업료 또한 너무도 당연하고 정당한 가르침의 대가다. 여기까지 읽어본 독자들은 대부분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손을 들어줄지 모르겠다. 그만큼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상식은 그 어떤 편견보다도 깨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갑자기 생뚱맞은 물음을 던진다. 덕은 하나인가? 아니면 덕은 참된 지식, 절제, 용기, 정의, 경건 등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의도를 알 리 없는 프로타고라스는 덕은 여러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얼굴의 눈, 코, 입이 각각 다른 역할과 모양을 하듯 서로 구분된다고 답한다. 여기서부터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는 길고 긴 논리 싸움을 전개한다. 고수들끼리의 승부인지라 일반 독자들이 좇아가기에는 숨이 벅찰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철학 논의들이 그렇듯, 여기서의 논쟁도 결과만은 단순명료하다.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과 절제, 용기, 정의, 경건은 실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프로타고라스는 이들이 모두 다르다고 주장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아주 상반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결말에 이른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는 어느새 서로의 입장이 뒤바뀌어 버렸음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절제, 용기, 정의, 경건이 지식과 같다면 이는 가르칠 수 있다. 지식은 당연히 교육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지식 아닌 무엇이라면 각각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우리교육 문제 푸는 실마리 던져 이러한 논의 결과에 따라 덕의 교육자라고 장담하던 프로타고라스는 덕은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한 꼴이 되어버렸다. 반면, 덕이란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하던 소크라테스는 사실 덕이란 교육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음이 드러났다. 철학적 논의 끝에 두 사람 모두 ‘논리의 덫’에 걸려버리고 만 것이다.
|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