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뤼노 라투르(맨 오른쪽)는 병원체나 전동차처럼 인간이 아닌 것들이 과학지식의 생산과 수용, 확장에 큰 구실을 한다는 독특한 이론을 내어놓아 주목을 받았지만, 학계에서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사회적 결단을 요구할 수도 없는 인간 이외의 생물체나 사물에 사회학적 구실을 부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4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
파스퇴르 세균이론 확립에서 그랬듯이 탄저균·축산업자·수의사 등 다양한 이해집단 석득하고 동원해 연합체로 엮는 과정이 새 지식의 사회적 확산 위한 필수 요소 라투르는 ‘테크노사이언스’ 용어 유행시키기도
과학속 사상, 사상 속 과학/18.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 독창성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한 사람의 철학자가 각각 고립된 성과 같아서 다른 학자의 작업에 의존하는 것을 꺼려하는 프랑스 학계에서 라투르는 자신의 독특한 철학 세계를 가진 여러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 결코 데리다나 들뢰즈에 비할만한 명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프랑스 바깥에서, 특히 과학기술에 대한 철학적, 역사학적, 사회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기술학자들 사이에서 라투르가 차지하는 지적 위치는 독보적이다. 우선 그는 자연세계에 대한 순수한 과학지식의 응용으로 기술을 파악하는 전통적 견해에 맞서 현대에는 과학과 기술이 많은 경우 서로 구별되기 어려운 형태로 융합돼 연구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테크노사이언스’라는 용어를 유행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라투르가 과학과 기술 사이에 혹은 과학연구와 공학연구 사이에 어떤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줄기세포 연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확립된 지식으로서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구체적인 연구 활동으로서의 과학기술에서는 두 분야 사이의 경계를 찾는 일이 쉽지도 않고 적절한 이해의 틀을 제공해주지도 않는다. 테크노사이언스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만 이해될 수 있는 특징들이 현대 과학기술에 있기 때문이다. 라투르의 또 다른 공적은 거의 홀로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라는 새로운 분석틀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두드러진 특징은 과학기술 지식의 생산과 전파 그리고 뒤따르는 발전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련 과학자나 이해집단과 같은 사람이나 사람의 집단만이 아니라 병원균이나 전동차와 같은 인간이 아닌 생명체나 사물도 행위자로 분석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1988년에 출간한 <프랑스의 파스퇴르화>라는 책에서 파스퇴르가 세균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프랑스 전역에 확장시키기 위해 관련 행위자들을 어떻게 적절히 동원하고 설득했는지를 보여주었다. 현대에는 과학과 기술 구별 어려워 그 당시 탄저병은 프랑스 전역에서 축산업자와 수의사를 괴롭히던 질병이었는데 파스퇴르는 이 병을 소들이 자유로이 풀을 뜯는 들판에서 자신의 잘 통제된 실험실로 ‘번역’해 들여와서는 다양한 분석기법으로 그 특징을 추출하여 통제가능하게 만든 다음에 이를 다시 프랑스 전역에 파스퇴르의 플라스크 형태로 퍼뜨렸다. 이 과정은 파스퇴르가 현미경으로 탄저균을 발견하고 이를 산소에 노출시키는 방식 등으로 약화시킨 뒤 소에 주사하면 면역력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프랑스 축산업을 구원함으로써 질병의 세균설을 성공적으로 확립한 사건으로 간단하게 이해될 수는 없다. 파스퇴르는 자신의 이론과 플라스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 프랑스의 농촌을 자신의 실험실과 유사하도록 변화시켜야 함을 알고 있었고 (복잡한 사용법을 제대로 따르지 않다가 민감한 전자제품을 망가뜨려 본 경험이 있는 독자는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변화를 현실화하기 위해 수많은 이해집단을 적극적으로 설득해나갔다. 탄저균과 축산업자, 수의사처럼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을 이러한 교섭과 동원의 과정을 통해 일종의 연합체로 엮어내는 과정은 특정 과학지식이 사회전체로 퍼져나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데, 이 점이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핵심이다.
라투르의 견해는 에딘버러를 중심으로 제기된 과학지식사회학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고 과학사회학계 안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사회학적 분석을 강조하는 쪽은 비록 라투르의 지적처럼 인간이 아닌 것들이 과학지식의 생산과 수용, 확장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사회적 결단을 요구할 수도 없는 그것에 사회학적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비판한다. 특히 라투르의 시각은 과학지식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갖는 비판적 기능과 실천적 힘을 약화시킬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라투르는 과학지식사회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사회학적 분석에서 제외되어 온 과학지식에 대해 사회적 교섭의 중요성을 강조한 신선한 분석을 제공했으면서도 그 틀을 더욱 확장시킨 자신의 분석은 꺼려하는 보수적 태도를 보인다고 질타한다. 이 논쟁은 현재에도 각각의 입장을 지지하는 여러 사례연구를 통해 계속되고 있다. 다만 라투르가 사물의 정치화를 선언할 때 그것이 예를 들어 탄저균이 은유적으로 인간과 동등한 행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겨질 수 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존재론적으로 둘이 진정으로 동등하다는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는 아마도 라투르가 엄격한 존재론적 구획짓기에는 원래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투르의 문체는 매우 독특하다. 그의 글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수사와 비유, 은유로 가득 차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발적인 중심 메시지가 불분명한 것은 아니다. 다만 글 전체의 흐름이나 주요 논증을 주도하는 서사구조를 분명하게 집어내기가 어려운 반면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의 이야기 속에 담아내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 이 점에서 도나 하라웨이와의 유사성을 찾아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프랑스 철학자에 비해 라투르의 참신한 주장들은 훨씬 이해하기 쉽고 명료하다. 언젠가 라투르는 자신의 학문적 스타일에 대해 프랑스에서는 지나치게 영미적이라고 하고 프랑스 외부에서는 지나치게 프랑스적이라고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 정도가 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과학사회학계 격렬한 논쟁 불러 브뤼노 라투르는 1947년 포도주의 산지로 유명한 부르군디 지방에서 대대로 물려오는 포도재배 집안에서 태어났다. 라투르라는 이름이 붙은 유명한 포도주는 보르도 지방의 샤토 라투르와 버건디 지방의 루이 라투르가 있다. 라투르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이 둘을 혼동하지 말아달라고 특별히 부탁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집안에 대한 라투르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라투르는 우선 철학자로 훈련받았고 이후에는 아프리카와 캘리포니아에서 현장연구를 통해 인류학자로 학문적 캐리어를 쌓으면서 포도주 생산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게 된다. 이를 두고 라투르는 자신이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포도주 생산이 아니라 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다시는 포도주 업계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을 마라’는 말을 가족들한테서 들었다고 농담조로 말하곤 한다. 하지만 여전히 해마다 질 좋은 부르군디 포도주는 맘껏 마실 수 있는 가족특권은 유지하고 있으니 그리 나쁜 직업선택은 아닌 셈이다. 라투르의 교육배경이 철학과 인류학이라는 점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국내에는 그가 과학사회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저술 어디에도 경험적 자료의 제시나 거대이론에 입각한 분석을 강조하는 영미 사회학계의 전형적 경향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라투르는 프랑스 철학자답게 사회철학과 생태인류학을 넘나들며 17세기 보일-홉스 논쟁의 정치학적 함의와 20세기 말 파리 미니 전동차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결합시키는 종횡무진함을 보여주고 있다. 라투르를 영미권 학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린 연구서인 <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사회적) 구성>에서부터 그의 ‘인류학적 거리두기’ 기법이 드러난다. 그는 이 기법을 활용하여 솔크 연구소에서의 TRF의 발견에서부터 아마존 밀림부족의 흙에 대한 암묵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물질의 발견과 그 특성의 인정과정을 타인의 시선으로 낯선 문화를 분석하는 전형적인 인류학적 방법론을 원용하여 거시적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라투르의 공식직함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Ecole Nationale Superieuer des Mines에서 사회학 교수이다.
|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dappled@hanyang.ac.kr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