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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2 17:32 수정 : 2005.09.23 14:25

말글찻집

1882년(비애왕 19년) 임오년 6월9일에 ‘군란’(분거)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지만 그 뒤가 어떻게 됐는지는 아는 이가 드물다. 역사에서 인과율을 모르는 백성은 역사학에 약한 겨레로 되고, 이로써 나라를 지키는 힘 또한 약해진다.

광복 뒤 <한국사 대관>(1964·이병도), <한국사 신론>(67·이기백)에서도 ‘인과율’을 기술하지 못했다. 역사학은 인과율에서 제 나라 기준으로 기술하는 과학이라는 것을 깨치지 못했던 까닭이다. 원인보다 결과에서 ‘용어’가 정해진다. 결과가 소중하게 되는 것은 그 영향을 따지기에 무겁게 다루어지는 것이다.

임오년에 경군(京軍)이 민비 정권을 몰아내려고 대궐에 들어갔다.(고종실록은 이를 ‘난병범궐’이라 했는데, 고종실록은 이완용의 아들인 이왕직 책임자 이항구가 맡아 만듦. 이 ‘분거’는 청·일 양국의 개입으로 좌절함) 훈련교관 일본군 소위 ‘굴본예조’를 두들겨 죽였다. 일본공사관으로 가서 유리창을 부수었다. 공사 ‘화방의질’은 일본으로 달아나서 죽임을 면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기뻐 날뛰면서 장례비·위자료·피해보상금으로 도합 일본돈 55만원을 청구했다. 그 청구서 이름인즉 ‘조일강화조약’으로 되었다. 일본공사 화방의질과 조선국 개국 491년 7월17일 전권대신 이유원, 전권부관 김홍집이 서명했다.

조선 정부에 일본돈이 없음을 뻔히 알면서 이를 청구한 것이다. 조선 정부는 낭패스러웠다. 그러던 가운데 일본 정부 통고가 왔다. 조선국이 일본돈을 갚기가 어렵거든 이 조약문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문서가 이랬다. “부산·원산·인천에서 일본사람이 살 수 있는 범위를 넓힌다. 지난날 병자년(1876)에 정해 두었던 그 10리를 50리로 널리고, 또 2년 뒤 갑신년(1884)부터는 100리로 널린다”는 것이었다. 이 문서에 달려 있는 제목인즉 ‘수호조규속약’이, 그 들머리는 ‘일본국여조선국’(~與~)으로 돼 있다. ‘강화조약’ 뒤에 ‘수호조규속약’이 같은날 같은사람 손에 서명·조인됐다.

병자년에 ‘수호조규’라는 말로 항구 셋을 빼앗았고, 그 뒤엔 또 ‘수호조규 부록’이란 말로 부산 동래 20리 땅을, 임오년에 이르러 또 수호라는 말을 써(수호조규 속약) 300리 땅을 빼앗았던 것이다. ‘조규’나 ‘조약’은 조선말로는 ‘약조’(約條)로 되는 것인데, 요즘도 ‘조약’으로 쓴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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