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22 18:28
수정 : 2005.09.2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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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앞에서 본 중세
키아라 프루고니 지음. 곽차섭 옮김. 도서출판 길 펴냄.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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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 필수품 안경 비롯해
종이·은행·숫자·마취·총까지
중세 때 발명되거나 도입되거나
누가 중세를 ‘암흑기’라 부르나
이탈리아 로마 2대학 중세사 교수 키아라 프루고니가 쓴 <코앞에서 본 중세: 책, 안경, 단추, 그밖의 중세 발명품들>을 완역한 <코앞에서 본 중세>(도서출판 길 펴냄)는 우리가 상식처럼 떠올리는 ‘암흑의 중세’라는 이미지로 서양 중세시대 전체를 일반화해서는 왜 안되는지를 매우 흥미롭고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 방식은 ‘물건의 생활사’라는 도구를 활용하는 것인데, 이 책을 번역하는데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곽차섭 부산대 교수(서양사)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물건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만들어졌는지, 나아가서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 기존의 다른 물건 혹은 생활 습관과 어떤 연관을 맺게 되었는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물건의 생활사를 추적하다 보면 한 국가나 문명권의 경계를 넘게 되고, 하나의 물건을 통해 문화의 비교까지도 가능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 프루고니가 “중세 최고의 발명품”이라며 맨 먼저 들고나온 물건은 안경이다. 오늘날 다수의 한국인들에게도 필수품이 되다시피한 안경의 원형은 13세기 이탈리아에서 탄생했으며, 당시 주요 소비자들은 글(주로 기독교 관련 서적이지만)을 읽어야 하는 수도원 등의 성직자들이었다. 14세기 중엽에 그려진 채색 세밀화 <종부성사의 거행>에는, 일반 관람자들은 무심코 그냥 지나치겠지만, 4명의 도미니쿠스 수도사들 가운데 맨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노란 테의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또렷이 그려져 있다. 15세기 자크 드 귀즈가 그린 세밀화 <작업중인 프란체스코 수도사>에도 서적을 필사하고 있는 수도사 옆 책 위에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납 막대가 얹혀 있고 책상 위에는 긁개 칼과 잉크병, 그리고 붉은 테의 안경이 놓여 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화려한 채색화들 중에는 <허리끈에 안경집을 달고 있는 성 베르나르디노 다 시에나>, <안경의 도움으로 복음서를 쓰고 있는 기자 누가(루카)>도 있다. 훨씬 앞선 시대의 누가에게조차 안경을 씌운 것은 화공이 살던 14-15세기엔 적어도 특정 계층에서만큼은 안경이 일반화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의 안경은 아직 다리가 달려 있지 않았다. 가위처럼 연결고리 양쪽에 동그란 테가 달려 접었다 펼 수 있게 돼 있어, 적절히 펴서 코 위에다 걸치고 사용했다. 끈 달린 안경의 흔적이 등장하는 것은 1564년 피에터 브뤼겔이 그린 패널화 <동방박사의 경배>에 와서다.
이 책의 최대 장점 중의 하나는 바로 이처럼 과거사실을 생생하게 입증해주는 이런 다양한 자료들(그림과 서적·시·편지 따위의 문헌들)을 기막히게 찾아내서는 실로 적절하게 배치해놓고 있다는 것이다.
안경 다음 이야기는 같은 재료인 유리를 매개로 유리창, 스테인드글래스로 이어지고, 유리창이 등장함으로써 침투한 햇살이 경이롭게 일변시킨 밝은 실내풍경 속의 벽난로, 그 옆의 고양이…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종이, 활판인쇄, 책, 대학, 오늘날 고액권 지폐제작에 활용되는 종이속의 투명무늬, 아라비아 숫자, 제로(0), 기원 연표, 은행, 공증인, 전당포, 가계도, 음계와 음표, 단추, 팬티 등 속옷, 바지, 카드놀이, 타로카드, 체스, 카니발, 마취, 파스타, 물레방아와 풍차, 손수레, 말발굽 편자와 등자와 어깨줄, 나침반과 키, 채색 깃발, 화약과 총·대포, 톱니바퀴 시계, 연옥, 산타클로스…. 원저의 제목처럼 이런 물건과 제도와 의식 모두가 서양 중세 때 ‘발명’된 건 결코 아니지만, 대다수가 그때 서양에서 발명되거나 서양 외부에서 도입돼 생활속에 정착하고 발전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까지 이어진 것들이다.
서양 중세가 어둡고 무지몽매하고 정체된 ‘암흑시대’였다는 ‘상식’은 상당부분 ‘오해’이며 특유의 개성과 활력을 지닌 살아 움직이는 시대였던 것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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