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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2 18:43 수정 : 2005.09.23 14:22

사랑은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역겨움을 느껴 차라리 죽음을 갈망하게 될 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셰익스피어는 노래한다. 89번 소네트는 사랑이란 다른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 상대 앞에서 나를 완전히 낮추는 것, 그리고 마음의 변화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 바로 그런 것임을 말해준다. 그림은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브론지노의 유화 작품 <비너스와 큐피트의 알레고리>.

“사느냐 죽느냐’ 고뇌의 물음표를 안은 인간 산다는 것의 슬픔을 견뎌낼 원천은 무엇인가? 영원한 사랑에의 복종이다 그로 인한 고귀한 존재가 되나니 오만한 자는 결코 사랑할 수 없음을 노래한다

고전 다시읽기/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

결국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다. 계절의 변화로 우리는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생겨났다가, 변하고, 마침내 소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묶인 덧없는 인간 삶의 신비와 고통을 깨닫게 된다. 시간의 변화를 제일 먼저 전하는 것은 바람이다. 하루상간에 달라진 바람은 여름이 가듯이 이제 곧 가을도 간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바람이 인간의 영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시인의 마음에 창조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희랍어로 ‘영혼’을 뜻하는 프시케(psyche)도 ‘숨을 쉬다’라는 뜻의 프시케인(psychein)에서 나왔고, 시적 상상력의 원천인 ‘영감’(inspiration)도 라틴어로 ‘숨을 불어넣다’(in-spirare)라는 뜻이다. 오랫동안 바람은 인간의 영혼, 마음, 숨결을 움직이고 우리 마음에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이라고 생각되었다.

가을바람이 부는 이즈음 새로운 숨결을 느끼고 싶다면 뛰어난 시적 상상력을 지녔던 셰익스피어(1564~1616)의 <소네트 시집>을 한번 읽어보자. 소네트란 일정한 운율과 형식을 갖춘 14줄짜리 사랑의 시를 말한다. 이것은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이후 르네상스 시기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사실 셰익스피어는 그가 남긴 154편의 소네트들보다 4대 비극을 포함한 많은 역사극과 희극을 쓴 극작가로서 더 유명하다. 아직도 널리 회자되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독백은 아름다운 이 세상에 왜 불의와 부정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옳지 못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사람으로서 위엄과 고귀함을 지킬 수 있는지에 관한 철학적 물음이었다.

햄릿은 “압제자의 횡포와 세도가의 멸시, 버림받은 사랑의 고통과 재판의 지연, 관리들의 오만과 소인배의 모욕” 같은 돌팔매를 견뎌내는 것이 고귀한지, 아니면 불의에 맞서 그른 것을 바로잡는 것이 더 고귀한 인간정신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질문엔 답을 내리기 어렵다. 튜더왕조의 절대군주제와 제국주의가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엔 불의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한 때 고귀한 뜻을 품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변절하고, 재판은 지연되고, 권력과 돈 때문에 약자들은 아직도 멸시를 당한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들은 크게 보아 세상사에 대한 성찰과 영원한 사랑에 대한 열망을 담은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햄릿이 보인 세상사에 대한 성찰은 그대로 소네트 94번으로 이어진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과연 고귀한 사람인가? 그것은 “남을 해칠 힘이 있으면서도 아무도 해치지 않고/ 당장 행할 수 있는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며/ 남을 감동시키면서도 자신은 돌처럼/ 냉정히 움직이지 않아 유혹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일단 고귀한 뜻을 꺾고 불의에 굴복하게 되면 결국 사람은 가장 천한 잡초보다 더 천박해진다. 셰익스피어는 “가장 달콤한 것도 행실에 따라 시큼해지기에/ 썩은 백합은 잡초보다 더 악취를 풍기도다”라며 사람이 가야 할 변함없는 길을 노래하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성찰

소네트 66번에서 밝히듯이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역겨움을 느끼기도 한다. “유덕한 사람이 거지로 태어나고/ 형편없는 작자가 화려하게 성장하고/ 순진한 신의가 불행히 기만당하고/ 찬란한 명예가 부끄럽게도 잘못 주어지고/ .../ 예술과 학문이 권력에 눌려 벙어리가 되고/ 바보가 학자인 양 유능한 사람을 지배하고/ 솔직한 진실이 어리석은 짓으로 오해받고/ 선한 포로가 악한 적장을 섬기는” 현실 앞에서 누구나 차라리 죽음의 안식을 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놀랍게도 400년 전 셰익스피어가 역겨워했던 현실의 고통과 모순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고단한 삶을 위로받을 것인가? 시간의 변화와 산다는 것의 슬픔, 죽음의 두려움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답은 완전한 사랑에의 복종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또 다른 중요한 테마는 변치 않는 완전한 사랑이다.

정의와 평등은 인간의 법이 정하는 최선이다. 하지만 결국 불의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은 법제도보다는 사람들의 자비심과 사랑으로 가능할 것이다. 사랑은 복종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자비는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나오지 않는다. 사랑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완전한 주의집중이다. 그래서 오만한 자는 결코 사랑에 빠질 수 없다. 마치 두 무릎을 꿇고 신을 경배하듯 자신을 낮춰야만 사랑이 가능하고, 이렇게 자신을 낮추면 누구나 타인을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된다. 사랑과 자비는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신에 가까운 특징이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역겨움을 느껴 차라리 죽음을 갈망하게 될 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사랑일지도 모른다.

어떤 허물 때문에 나를 버린다고 하시면,

나는 그 허물을 더 과장하여 말하리라.

나를 절름발이라고 하시면 나는 곧 다리를 절리라,

그대의 말에 구태여 변명 아니 하면서.

사랑을 바꾸고 싶어 그대가 구실을 만드는 것은

내가 날 욕되게 하는 것보다 절반도 날 욕되게 할 수 없도다.

그대의 뜻이라면 우리의 친교를 청산하고,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리라.

그대 가는 곳에는 아니 가리라.

내 입에 그대의 이름을 담지 않으리라

불경한 내가 혹시 구면이라 아는체하여

그대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그대를 위해서 나는 나 자신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도 결코 사랑할 수 없으므로.

사랑은 산에 가장 가까운 모습

셰익스피어의 89번 소네트는 사랑이란 다른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 상대 앞에서 나를 완전히 낮추는 것, 그리고 마음의 변화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 바로 그런 것임을 말해준다. 설령 내 허물이 그대 마음을 바꾸는 구실이 되더라도 진실한 사랑은 그 뜻조차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정이 변할 때 변하거나/ 애인이 변심하면 따라서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생각해보면 놀랍도록 신비로운 일이다.

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어느 한 순간 어떻게 우리가 만나게 되는지, 어떻게 나에 앞서 항상 다른 존재를 먼저 마음에 둘 수 있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바람이 불 때 인간에게 이토록 선한 천성이 되살아나는지 정말 신비로울 뿐이다. 삶은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시간은 아무리 젊은 투지와 고귀한 신념으로 빛나던 얼굴이라도 깊은 주름을 만든다. 세월이 가면 우리는 사는 동안 겪은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 모욕과 절망을 뒤로한 채 결국은 돌아가게 된다. 사랑이란 인간이 이 먼 우주의 바다를 지표도 없이 표류할 때 저마다의 길을 밝혀주는 하늘의 별과 같은 것이다. 결국은 신을 닮은 가장 아름다운 본성인 사랑으로 우리는 고귀한 존재가 되고, 한낱 먼지 같은 이 세상에서 영원과 불멸이라는 신의 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햄릿이 절망했던 이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우리가 견뎌내도록 신이 보내주신 고귀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50자 서평

◇ 카를(알라딘 마이리뷰에서) “셰익스피어가 장중한 맛의 기존 소네트를 비웃으려는 의도로 쓴 것을 드러내듯 번역자(피천득)는 해학과 장난기를 담아냈다. …후반부의 ‘윌과 윌의 경쟁’과 ‘아이 버리고 닭 좇아가는 엄마’ 같은 시는 요절복통감이다.”

◇ 글로부스(〃) “여기에서 셰익스피어는…가련한 실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사람이 숨 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나의 시는 살아 있을 것이고 그대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와 같은 자기 예술의 불멸에 대한 확신은 깊은 감동을 준다.”

◇ 테피(아마존 마이리뷰에서) “셰익스피어 소네트 안에는 인생 전체가 있다. 인생의 즐거움과 슬픔, 열정과 좌절과 고통들 모두가 때로는 그 어떤 영시보다 더욱 낭랑하고 아름답게 표현되고 영혼을 깊숙히 파고드는 강한 리듬을 이룬다.”

▽ 다음주 이후 고전 <열하일기>, <벽암록>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서평자 추천 도서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피천득 옮김

샘터사 펴냄(1996), 8000원

(154편 모두 피천득의 주옥 같은 우리말 솜씨로 번역된 시집)

셰익스피어 사랑의 시

한기찬 옮김

작가정신 펴냄(2001), 5000원

(소네트 집과 희곡에서 간추린 사랑의 시 선집)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이해

신영수 지음

한신문화사 펴냄(2000), 1만3000원

(소네트의 유래와 특징, 시 분석이 담긴 셰익스피어 소네트 해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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