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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문화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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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표준시간을 만들도 근경을 원경으로 대체했다 직선회로 고속철도는 우주선 같은 완결공간 원경마저도 없애버렸다 공간압축·시간혁명 너머 굽이 돌아가는 길과 느린 것들의 자린 어디인가
생활속의 문화사회학 ‘시베리아를 지나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어떤 날은 종일 보리밭 사이를 달리다가도, 어떤 날은 호수를 끼고 한없이 달리기도 했다. 가는 도중 다른 열차와 만날 때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역 구내에서 기다렸다가 달리곤 했다. 열차가 서 있는 동안 굳어진 몸도 풀 겸 우리는 가끔 철도를 따라 뛰어보곤 했다.’ 이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가 독일로 가는 여정을 회고한 글이다. 당시 그는 배나 비행기가 아닌 기차로 유럽에 갔다. 서울역을 출발한 열차는 신의주, 하얼빈, 만주와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이르렀고, 거기에서 베를린 행 열차를 갈아탔다. 분단되기 전에 한국과 유라시아 대륙은 그렇듯 육로로 오갈 수 있는 연속 공간이었다. 유럽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된 것은 18세기 중엽, 그리고 그것을 이용한 기차의 개발은 19세기 초, 그 이후 반세기 동안 급속하게 철도망이 확대되었다. 철도는 단순히 이동과 수송을 빠르게 한 것만이 아니다. 열차 시각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생겨난 표준시는 각 지역의 다양한 시간들을 대체해갔다. 또한 기차는 사람들의 공간 인식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볼프강 쉬벨부쉬의 [철도여행의 역사]에서 상세하게 분석되고 있다. 기차를 타고 가면 가까운 사물들은 빨리 스쳐지나가고 오히려 먼 경치가 안정감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기차가 등장하기 전 사람들이 걸어가거나 마차를 타고 갈 때는 몸과 전경(前景)이 상호삼투적인 관계에 놓였다. 그런데 이제 그 연계가 해체되고 신체와 완전히 떨어져 있는 원경(遠景)만이 마치 스크린 영상처럼 펼쳐지는데, 이를 ‘풍경의 파노라마적 지각’이라고 한다. 속도는 그렇듯 시각 체험의 구조를 바꿔놓았다. 20세기의 개막과 함께 깔리기 시작한 한국의 철도는 식민지 수탈의 아픔과 근대문명의 경이로움을 함께 싣고 달렸다. 최남선의 <경부철도가>에는 후자에 대한 예찬이 잘 나타난다. ‘우럿탸게 / 토하난 / 긔뎍소리에 / 남대문을 / 등디고 / 떠나가서 / 빨리부난 / 바람의 / 형세갓흐니 / 날개가진 / 새라도 / 못따르겠네.’ 당시 기차의 속도는 기껏 시속 40㎞ 정도였지만, 새들을 추월하는 스피드에 처음 몸을 실으면서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나 이제 철도와 기차는 더 이상 신문명의 상징이 아니다. ‘기차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는 동요는 멀리 흘러간 노래가 되어버렸다. ‘칙칙폭폭’ 소리는 기성세대의 추억 속에만 아련히 남아 있다. 바야흐로 시속 300㎞를 주파하는 케이티엑스(KTX)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이제 전국은 3시간 생활권으로 좁아졌고, ‘서울시 천안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충청도까지 수도권으로 편입되어오는 추세다. 백화점과 병원들이 손님을 빼앗기고, 그쪽 지역에서 기숙하던 직장인과 학생들이 수도권에서 통근 통학하게 되면서 원룸 가격이 떨어졌다. 주말 부부가 KTX 통근 거리에 집을 마련해 평일부부로 회귀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일명 ‘KTX 부부’) 또한 전국 어디든 당일로 다녀올 수 있게 되면서 출장 문화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지방의 숙박업 매출이 줄어든다. 다른 한편 서울 사람들이 신선한 회를 먹으러 부산까지 원정가는 등 일일관광의 반경이 확대되면서 연계 상품도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다. KTX는 그렇듯 이동의 속도를 높이면서 일상공간을 광역화하는 것이다. 변화는 양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고속철도는 여행의 질감을 바꿔놓고 있다. KTX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창밖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동시간을 최대한 단축해야 하는 여정에서, 출발지와 목적지를 쾌속으로 잇는 직선 회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공간이다. 외부세계와 단절된 열차는 우주선 같은 추상 공간이 되고, 그 속에서 방향감각은 상실된다. 그 밀실에서 승객들은 잠을 자거나 사무를 보거나 책 또는 신문을 읽는다. 아니면 천정의 텔레비전으로 무료함을 달랜다. 열차 바깥으로 펼쳐지는 경치, 길과 마을과 산세가 어우러지는 그 장소성은 증발되어버렸다. 이제는 원경(遠景)마저도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바깥을 바라보지 않는 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한국의 고속철도에는 굴이 너무 많아 풍경의 파노라마가 툭툭 끊기기 때문이다. 유난히 산이 많은 지형에서 곧게 길을 뚫다 보니 엄청난 암흑지대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곡선이 가득한 한반도에 굵직한 직선을 탄환처럼 관통시키는 대역사(大役事)는 오천년 역사에 엄청난 국토개조가 아닐 수 없다. KTX는 생활과 업무의 리듬을 가파르게 정렬시키면서 공간을 대거 압축하는 시간 혁명이다. 디자인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지만 고속철도는 성장의 열매요 선진 한국의 긍지다. 속도의 효율은 생활의 풍요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고속 열차에 부딪혀 죽어가는 산비둘기들처럼, 그리고 사라져버린 ‘비둘기호’처럼, 느린 존재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빨리빨리’에 대한 강박 속에 상실한 풍경을 되찾는 눈길은 어디에 있을까.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키 작은 소나무 하나’(노래 ‘기차와 소나무’ 중)를 넌지시 바라보는 시선이 그립다. 지난해 12월 경춘선의 신남역은 ‘김유정역’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고장 특유의 풍토와 문화유산을 관광자원으로 활성화하려는 시도다. 고속질주의 도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마을의 자취를 보존하면서 삶을 재생하려는 손길이 거기에 있다. 그 매력을 진정한 상품가치로 빚어내기 위해서는 여행자들의 마음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천천히 가는 행보의 멋을 알고 아름다움에 머물러 음미하는 눈길에서 지역의 다양한 얼굴이 발견될 것이다. 산을 따라 강을 따라 느릿느릿 ‘굽이 돌아가는 길’(박노해 시) 위에 이따금 몸을 실어 보자. 거기에서 우리의 시야와 심경은 한결 넓고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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