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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9 16:56 수정 : 2005.09.30 16:54

역사로 보는 한주

1976년 10월6일 장칭(강청·마오쩌둥 부인·중앙문혁소조 부조장·중앙정치국 위원), 장춘차오(장춘교·부총리·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야오원위안(요문원·중앙정치국 위원), 왕훙원(왕홍문·당 부주석·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등 이른바 ’4인방’이 체포당했다. 이로써 1965년 11월10일 야오원위안이 상하이 <문회보>에 마오쩌둥한테서 비판당한 펑더하이(팽덕회)를 변호한 우한(오함)의 희극 <해서파관> 비판문을 발표한 이래 전세계적인 관심속에 10여년간 계속된 중국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엄청난 후유증과 역사적 과제를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이후 중국혁명은 재기한 덩샤오핑 주도로 다시한번 극적으로 물줄기를 틀었다.

문화대혁명 주체세력은 인민공사·대약진정책의 실패 후유증, 사회적 불평등 확대와 사회주의 비전 쇠퇴, 마오의 실권 약화 등을 배경으로, 의식·문화혁명을 통한 전면적 사회개조, 곧 소련과는 다른 사회주의사회 건설을 지향했으나 통제불능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숱한 피해와 희생자를 낳았다. 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가 채택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는 문화대혁명을 “지도자가 잘 못 발동하고 반혁명집단에 이용돼 당과 국가, 인민들에게 중대한 재난을 가져다준 내란”으로 총괄평가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에 대해 “70% 공이 있으나, 30% 과도 있다”고 평가했다.

4인방 체포 약 한달 전인 76년 9월9일 마오가 8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1월에는 저우언라이(주은래·78)가 타계했고 7월에는 홍군의 아버지 주더(주덕·90)가 숨졌다. 그에 앞서 75년 4월엔 중국공산당 창설 멤버 둥비우(동필무)가, 12월에는 마오의 측근으로 ‘중국의 베리아’로 불렸던 캉성(강생)이 세상을 떴다. 이들의 죽음으로 5·4세대의 중국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들은 반세기 이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에서 가장 근대적인 혁명이론을 실천했다. …그들은 근대세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극적인 혁명의 지도자들이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낙후된 나라의 근대적 변용을 처음으로 이끌었다. …아주 빈약한 물질적 기반 위에서 그들은 중국을 근대적이고 통일된 국민국가로 변화시켰으며 근대산업경제의 기초를 놓았다.”(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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