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9.29 16:59 수정 : 2005.09.30 16:54

고도성장기 일본사회에 큰 영향끼친 1970년 오사카박람회
당시 열광했던 십대를 ‘만박소년’이라 부른다
이들중 한국서 가장 유명한 이가 만화가 우라사와
‘만박체험의 꿈’ 모조리 담은 ‘20세기 소년’ 통해
그 세대의 향수가 고스란히 다가온다


이재현의 인물로 세상읽기

‘자연의 예지’를 주제로 내건 ‘2005 아이치 지구박람회’가 지난 9월25일 막을 내렸다. 별칭으로 ‘지구사랑 박람회(愛ㆍ地求博)’로 불린 이번 박람회는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근처의 세토에서 6개월 동안 열렸다. 우리말에서 그러하듯이 일본말에서도, 땅 사랑(愛地)과 아이치(愛知)의 한자어 발음은 똑같다.

아이치 박람회는 생태적 주제를 내걸고 시민 참가형 프로그램을 주된 내용에 포함하기는 했지만, 엄격한 눈으로 보자면 무늬만 생태지향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최 직전에 일본자연보호협회 등 대표적 환경단체 3곳이 멸종위기 미꾸라지의 서식환경 파괴를 둘러싸고 주최 쪽과 이견을 좁히지 못해 참가를 거부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번 박람회는 일본 매스컴에서 많이들 다뤄준 덕분인지 185일 간 2200만여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일본 안에서는, 가보니 좋더라, 또 좋으면 그만 아니냐는 입장이 있는 반면에 세금 낭비라는 비판도 있다. 이미 오키나와 해양박람회에서 드러났듯이, 이러한 초대형 이벤트는 지역 개발의 이슈와 관련해서 주민의 열렬한 기대 속에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어 출발하지만 결국 과실은 외지의 기업들만이 따먹어버리고 지역 자체는 지역 경제와 생태 환경 양쪽 모두 황폐해져버리고 만다는 비판인 것이다. 특히 아이치현에 거주하는 저널리스트 마에다는 <허식의 아이치 박람회>라는 책을 펴냈는데, ‘비공식적 가이드’를 자처한 이 책에다가 저자는 <토건국가 ‘최후의 제전’>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사회 전체에 준 영향의 면에서 보자면, 아이치박람회는 1970년 일본에서 열린 최초의 대규모 종합 만국박람회인 오사카 박람회에 분명히 미치지 못한다. 일본 고도성장의 시기에 열린 ‘오사카 만박’에는 6개월 동안 6400만명이 다녀갔다. 바로 한 해 전에 인류는 최초로 달을 밟았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일본 국민들 역시 텔레비전으로 이를 숨죽인 채 지켜본 적이 있는데, 오사카 만박에서는 바로 이 때 가져온 월석(月石)이 전시되었다. 물론 실제로 본 이들은 석탄처럼 별 볼 일 없이 생겼더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 당시의 흥분과 열광은 대단한 것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6개월동안 6400만명 다녀가

오사카 만박에 열광했던 당시의 십대를 일본에서는 만박소년이라고 부른다. 이제 중년이 된 만박소년들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를 거론하자면, 우선 20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다나카 고이치를 들 수 있다. 대학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고 평범한 샐러리맨 연구원이었던 다나카는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도 빨리 집과 직장으로 복귀하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면서 아내로부터 걸려온 핸드폰을 받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던진 바 있다. 1959년생인 다나카가 초등학생 시절에 오사카 만박의 상징이었던 ‘태양의 탑’ 앞에서 찍은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작품에도 이 태양의 탑이 묘사된다.

다른 만박소년으로는 비디오게임 기획사인 ‘가이낙스’의 창립자이고 일본 ‘오타쿠’ 1세대의 대변인인 오카다 도시오, <만박소년의 역습>과 <청춘의 정체>라는, 오사카 만박 관련 에세이집을 두 권이나 낸 만화가 미우라 쥰, 자유기고가이자 방송인인 야마다 고로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1958년생이다. 또 평범한, 그러나 적지않은 만박소년들도 오사카만박 때 직접 찍은 사진과 모은 팜플렛 등을 바탕으로 오사카만박 인터넷 사이트들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페미니즘 입장에서는 왜 만박‘소년’이냐고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책이나 인터넷에서는 만박소녀들을 만나기란 어렵다. 아마도, 지금 중년이 된 만박소녀들은 밖에서 술 퍼마시고 있는 만박소년들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텔레비전과 영화 속의 ‘욘사마’와 환상적 연애에 빠져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ㅎㅎㅎ…. 만박‘소년’들은 아주 귀엽지만 일본 아저씨들은 정말 매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을 테니까. 물론, 영화 <우나기> <섈 위 댄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배우 야쿠쇼 고지는 빼고서 하는 얘기다.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만박소년은 단연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1960년생)다. 그의 <파인애플 아미>는 해적판으로 번역된 적이 있고, 정식 번역판 <매스터 키튼> <몬스터> <야와라>도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소학교 2학년 때부터 공책에 SF장편만화를 그리기 시작해서는 중학교 때 만화를 잡지에 투고하기도 했다. 대학 때는 음악에 빠져서 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졸업 때에는 취직이 내정되어 있던 캐릭터 상품 완구회사의 디자이너직을 포기하고 직접 만화 잡지사를 찾아가서 자기 작품을 보여준다. 잡지사 편집부의 권고를 따라서 잡지 콘테스트에 작품을 응모해서 신인으로 데뷔한다.

우라사와가 만박소년으로서의 자신의 체험을 모조리 쏟아부은 작품이 ‘본격과학모험만화’라는 부제가 붙은 <20세기 소년>이다. 본디 ‘20세기 소년(20th Century Boy)'은 1970년대 글램록 아티스트 T-렉스의 노래 제목인데, 한국에서 가위질이 많이 된 채 소개된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벨벳 골드마인>에서는 저작권 문제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플레이스보(Placebo)의 연주 버전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우라사와는 ’만박소년‘이라는 말에 깃든 로컬한 느낌을 벗어던지고자 ’20세기 소년‘이라는 다소간에 글로벌한 단어로 표현해낸 듯하다.

현재 19권까지 번역된 만화 <20세기 소년>에서는 도처에서 오사카 만박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되풀이 소개된다. 만화의 서사적 현재는 오사카 만박을 전후한 시기와 세기말에서 Y2K에 이르는 시기 그리고 2014년 이후의 시기를 왔다갔다하면서 진행되고, 또 영화 언어에서 교차편집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통해서 수십명의 등장인물들의 모험 이야기를 동시다발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직 악당 ‘친구’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다가 여주인공 ‘칸나’의 행방불명된 어머니와 외삼촌의 현재 이야기도 소개되고 있지 않아서 앞으로 열 권 이상이라도 연재가 계속될 듯 싶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세대가 갖고 있는 노스탤지어가 설득력 있게 오늘날 외국의 10대와 20대 독자들에게도 전달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재미있다.

한국의 ‘과학소년’들은 어디로

오사카 만박의 주제는 ‘인류의 진보와 조화’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것인데, 어쨌든 그 당시의 만박소년들에게는 미래가 있었다. 이미 도쿄올림픽을 통해 전국민적 자신감을 얻기 시작한 일본 국민들이 처음으로 다수의 외국인들을 직접 만난 것, 그리고 패스트푸드가 일본에 처음 소개된 것도 다 이 오사카 만박을 통해서라고 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일본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친구에게 ‘이멜’을 보냈더니, 개인적 기억을 몇 가지 적어보냈다. 소련관이나 미국관 같이 인기있는 파빌리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땡볕 아래에서 아주 오래 동안 줄을 서야 했는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 두 번인가 세 번 오사카 만박에 갔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 중 분명히 한번은 19세기 말에 태어난 자신의 할아버지와 함께였다는 것, 그리고 임시로 설치된 화장실의 냄새가 아주 고약했다는 것 등이다.

이 친구는 지난 봄에는 DVD로 발매된 오사카 만박의 다큐영화를 보면서 옛날의 추억에 빠져 내내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 감정은, 박람회의 사회학이나 정치학을 학자로서 이성적으로 거론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인 바, 오사카 만박에 몰려들어서 일본 바깥 세계의 여러 나라의 이미지와 낙관적으로 제시된 미래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그저 순진무구한 동경과 호기심 속에서 즐겼던 당시 일본의 대다수 ‘고되게 일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특히 그러하다는 것인데, 자신이 이러한 구닥다리 세대의 끄트머리에 속한다는 게 자랑스럽다는 말을 “네가 이해할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단서와 더불어 이멜의 마지막에 덧붙인 것이다.

이재현/작가
왜 모르겠는가, ‘58년 개띠’인 나도 내 10대와 20대를 돌이키자면 늘 그러한 기분에 젖는데. 지금은 도서관으로 쓰이는 1960년 후반의 남산 어린이회관에서 미래의 과학기술에 감탄했던 과학소년들은 이제 다들 어디로 갔나, 혹은 70년대 후반의 고고장에서 함께 블루스를 추던 ‘20세기 소녀’들은 지금은 어디서 뭐 하냐며 속으로 돌이켜 묻게 되곤 한다. 그러면 묘하게도 서글프면서도 벅찬 복합적인 감동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밀어 오르기 마련인데, 그럴 때면 딥퍼플이나 신중현을 들으면서 노스탤지어를 살살 달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