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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9 19:58 수정 : 2005.09.30 16:58

갤리슨은 과학에서의 이론과 실험이 기구를 매개로 불연속적인 상호작용을 한다고 보았다. 그의 분석으로는, 이론·실험·기구는 독립적인 고유한 ‘삶’을 가지는 동시에, 국소적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에 다른 요소들과 상호작용을 주고받는다. 양자이론을 실험으로 증명하기 위해 가동되고 있는 기구인 스위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가가멜 챔버.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제공

토머스 쿤 잇는 과학사 차세대주자 갤리슨
“과학은 과학자들간 가회적 합의 아니라
각자 발견한 국소적 가치가 탈국소화한 것”
“언어 다른 두 마을 만나 의사소통하듯
서로 다른 과학끼리 소통하며 진화”
근원적 의미적 ‘포스트모던’ 과학 역설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 (20) 피터 갤리슨의 포스트모던 과학

과학사를 전공한다고 하면 종종 듣는 질문이 있다. 토머스 쿤 이후 과학사학계의 가장 대표적 업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혹자는 쿤 이후 과학사학계의 차세대 대표 주자는 누구냐고 좀 더 노골적으로 묻는다. 분야에 따라 학자들의 기여도가 다르고 역사학의 스타일이 단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꼭 대답을 해야 한다면 많은 과학사학자들이 하버드 대학교 과학사학과의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피터 갤리슨은 1988년에 <실험은 어떻게 끝나는가?>를 출판함으로써 학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여기서 갤리슨은 실험적 사실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 사회구성주의를 비판하면서, 과학에서의 실험이 그 실험이 행해지는 실험실의 국소적(local) 조건과 가치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른 그룹들을 설득하고 안정적으로 종료될 수 있는가를 분석했다. 특히 20세기 실험은 시뮬레이션과 컴퓨터를 사용한 데이터 분석 등이 개입되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론적 변수가 사용되기 때문에 마치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에 적합하게 이러한 변수들을 쉽게 조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갤리슨은 과학에서의 실험이 종료되는 것은 이러한 자의적인 변수의 조작 때문이 아니라 견해를 달리하던 다른 그룹마저도 (다른 기기를 사용해서) 실험을 했을 때 같은 실험결과와 해석이 나오기 때문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갤리슨의 작업은 과학이 과학자들 사이의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극단적인 사회구성주의를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그렇지만 그는 과학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이라고 설파하는 전통적인 과학철학자들과도 견해를 달리한다. 마치 사회구성주의자처럼 갤리슨은 과학자의 행위(practice)가 국소적인 가치들을 각인하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갤리슨에게 보편적인 과학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국소적인 과학이 탈국소화(delocalization)되면서 나타난 결과물인 것이다. 과학적 행위의 국소성과 탈국소화 과정은 갤리슨의 오랜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화두이다.

갤리슨은 1997년에 1000쪽에 가까운 대작 <이미지와 논리>를 출판했다. 이 책은 ‘기구’(instrument)에 대한 책이며, 실험에 대한 첫 책을 잇는 저술이다.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검출기에 ‘이미지 전통’과 ‘논리 전통’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이 두 전통이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따로 발전하다가 융합되었는가를 분석한 책이다. 갤리슨이 기구에 초점을 맞춘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는 과학에서의 이론과 실험이 기구를 매개로 불연속적인 상호작용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학에서 이론과 실험의 관계는, 이론이 실험을 결정하는 것도, 혹은 역으로 실험이 이론을 인도하는 것도 아니다. 갤리슨의 분석에 의하면, 이론, 실험, 기구는 다른 요소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고유한 ‘삶’을 가지는 동시에, 국소적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에 다른 요소들과 상호작용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이론-실험-기구 끊입없는 상호작용

과학에 균일하고 통일된 방법론이나 원리가 없다는 것이 과학을 허약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갤리슨의 입장이다. 아니 과학의 다양성과 잡종성은 오히려 과학을 튼튼한 것으로 만든다. 갤리슨은 베니어합판의 메타포를 사용하는데, 결이 다른 얇은 판을 겹겹이 엇갈리게 만든 베니어합판이 통판보다 더 튼튼하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의 메타포도 즐겨 사용한다. 과학에서 통일된 방법론을 찾으려 했던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들이나 칼 포퍼의 노력은 다양한 언어의 원류가 되는 보편언어나 원시언어를 발견함으로써 현재 사용하는 언어들을 관통하는 통일된 문법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보편언어에 대한 프로젝트가 오래 전에 포기되었듯이, 과학의 보편적 방법론을 발견하려는 철학적 노력도 비슷한 처지에 처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과학이 언어와 흡사하다는 갤리슨의 메타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보편언어가 없이도 서로 상이한 언어가 소통할 수 있듯이,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방법론이 없어도 서로 다른 과학의 분야들이 소통하고, 결합하고, 새로운 분야를 탄생시킨다.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을 전후해서 새로운 과학과 과거의 과학 사이에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공약불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갤리슨은 쿤의 공약불가능성이 과학을 개념적·지적 활동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얻어진 성급한 결론이라고 비판한다. 과학을 이론, 실험, 기구가 겹겹이 중첩되면서 이루어진 이질적인 활동의 총체로 보면, 개념적인 단절이 있을지라도 실험과 기구에서의 연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소통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이질적인 과학들간의 소통은 갤리슨이 오래 고민을 하던 문제였다. 그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두 부락이 서로 만나서 교역을 하는 경우에 이 교역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적, 실천적, 지리적 공간인 ‘교역지대’(trading zone)가 만들어진다는 인류학적인 연구를 이용해서, 과학에서도 이질적인 과학 분야들이 만나면 마치 서로 언어가 다른 두 부락이 만났을 때처럼 교역지대가 형성된다고 역설했다. 과학사의 사례 연구를 통해 갤리슨이 잘 보여주었던 과학의 교역지대에서 언어적인 잡종화와 이를 통한 새로운 언어의 발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역지대에서는 ‘피진언어’(pidgin)와 같은 간단한 잡종 언어가 만들어져서 서로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데, 상이한 과학 분야가 만나서 기초적인 소통을 가능케 하는 간단한 공통 언어를 만드는 과정을 피진화(pidginization)라고 할 수 있다. 피진언어가 문법과 복잡한 어휘를 구비한 체계적 언어로 성장한 것이 ‘크리올언어’(creole)인데, 과학의 경우에도 두 분야간의 상호작용이 새로운 학제간 분야를 만들어 내는 크리올화(creolization)가 존재한다.

거미줄처럼 얽힌 상대성이론과 시계

과학은 하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립된 군도(群島)들의 집합도 아니다. 서로 다른 과학분야는 이론, 실험적 요소들, 기구를 교환하고, 이러한 교환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과학 분야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과학과 공학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시공간과 물질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꾼 특수상대성이론을 제창한 아인슈타인이 특허국에서 시계를 맞추는 특허를 다루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갤리슨은 상대성이론에 시계의 공조화라는 물질문화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음을 흥미롭게 주장했으며, 양자전기동역학의 새 장을 연 파인먼의 ‘파인먼 다이어그램’(Feynman diagram)이 그가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에서 원자탄 개발에 참여했던 경험과 결부되어 있음을 보였다. 지난해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앙카레의 지도>를 출판한 갤리슨은 실험-기구-이론에 대한 자신의 3부작을 마무리할 계획으로 지금은 이론에 대한 저술에 전념하고 있다.

갤리슨이 제시하고 있는 과학의 이미지는 혼란스럽다. 갤리슨의 과학은 국소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지지만 탈국소화과정을 거치고, 간단한 언어가 만들어져 복잡한 언어로 성장하듯이 진화하며,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교역지대를 통해 다른 분야와 소통한다. 과학의 이론과 실험, 그리고 기구는 각자의 전통 속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하지만, 또 종종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극적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comenius@snu.ac.kr
상이한 과학들 사이에 소통은 전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하지도 않다. 사회문화적 요소들은 과학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에 침투하는데, 이것이 과학적 사실을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철학 사상과 얽혀 있듯이 과학은 기술이나 다른 물질문화와도 뗄 수 없다. 과학이 이렇게 복잡하고 ‘지저분한’(messy) 인간의 활동이라는 사실은 과학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튼튼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상투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근원적인 의미에서, 갤리슨이 보여주는 과학은 ‘포스트모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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