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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9 20:19 수정 : 2005.09.30 16:58

이상한 열기에 끌려 찾아간 입시책 없는 부산 ‘인디고서원’ 시험지 위 수인이길 거부하고 세상을 학교와 책 삼아 인문학의 향기를 맡는 아이들 오랜만에 참 행복했다

세설

“저도 시인처럼 해저물녘 시간을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그 시간에 저녁 도시락 먹고 부랴부랴 야자 준비하다 보면 날은 벌써 캄캄해져 있어요….” 내 산문집의 한 대목을 읽고 난 소녀의 목소리가 많이 젖어 있었고, 절개지를 지나는 바람처럼 내 마음도 울컥거렸다. 그날, 그처럼 일렁인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어떤 벗은 자신의 일기를 들려주었고 어떤 벗은 노래를, 시를, 열렬한 꿈의 모색을 얘기하며 자연스레 현실의 답답함까지 토로하게 되었다. 인문학의 숨결로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아름다운 정신의 향기를 공유하고 싶어한, 내가 만난 십대의 벗들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조금 쓸쓸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와 지금의 아이들이 느끼는 답답함이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 통의 초대 이메일을 받았고 나는 문득 길을 나섰다. 각종 강연과 모임들의 허전한 뒷자리가 두려워 웬만하면 잘 움직이지 않는 내가, 왠지 꼭 가야겠다는 이상한 열기를 느끼며 그들이 만나보고 싶어진 것이다. 가을의 초입이었고 몸살의 끝물이었다. 열차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내 시야를 스쳐가는 각종 입간판들이 주는 허기가 내가 만나게 될 아이들을 더욱 궁금하게 했다. 누렇게 펼쳐진 논 가운데나 도로변, 야트막한 산중턱에 거대하게 박혀 있는 입간판들에 <취업에 강한 ○○대학!> <교육부 무슨무슨 평가 몇 위의 ◇◇대학! 확실한 취업 보장> 등의 문구들이 가을 서리처럼 마음의 목덜미를 선뜩하게 하는 동안, 나는 자발적으로 모여 책을 읽고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어하고 스스로 초대의 자리를 준비하며 하하호호거리는, 본 적 없는 아이들의 온기가 그리웠다.

‘미래’라는 말을 함부로 발음하기 어려워진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도처에서 출구 없는 교육현실의 막막한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뛰노는 어린아이들에게 죄짓는 기분이 든다. 도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교육의 이상은 물 건너간 채 교사들도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답답한, 교육 주체 모두가 행복하지 못한 교육현장이란 도대체 뭔가. 공교육장이 이토록 엉망으로 회생 불가능하게 된 이유는 자명해 보인다. 극단적으로 서열화한 대학 체계가 존재하는 한, 학벌이 기득권으로 세습되는 한 교육현장의 과열한 입시경쟁은 사라질 수 없고 입시경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학교가 행복해지기란 불가능하다. 말랑말랑한 감수성과 창조의 에너지가 넘쳐나는 시기를 시험지와 교과서 속에 때려넣어 자기 색깔과 에너지를 박탈해버리는 지금의 ‘교육행위’는 관리들이 좋아하는 말대로라면 그야말로 국가적 낭비가 아니고 뭔가.

다행히도 그날 나를 초대해준 아이들은 시험지 위의 수인으로 자신들을 몰아가는 현실에 대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도권 학교 밖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자그마하고 아주 멋진 그들의 커뮤니티를 가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각종 인문학 서적들을 읽고 공감하고 문제제기하며 꿈의 향방을 타진하고 있었다. 현실의 답답함을 마음 깊이 호소하면서도 그 답답함에 주저앉지 않으려는 열기 가득한 꿈들이 내게 만져졌고 그것으로 나는 먼 길을 재촉해갔던 짧은 저녁시간을 충만하게 만끽했다.

정말 학문할 수 있는 대학만 남기고 대학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어. 대학에 진학하는 이들은 각 분야의 학문 연구를 평생 밀어붙이고자 하는 이들이면 족하지. 그걸 좋아하고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그 일을 하면 돼. 다른 걸 좋아하고 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걸 해야지. 세상이 모두 책이고 학교인걸. 가장 좋은 학교는 좋은 책들이지. 뭣 하러 다들 학교에 가야만 하는 거야? 얘들아, 우리는 학교를 텅텅 비우고 산이나 바다로 놀러 갈까? 입시와 경쟁의 스트레스를 버리고 공생하는 법, 상생하는 능력을 배우러 문학·예술·철학의 소모임들을 만들고, 다양한 교육목표를 지닌 다양한 대안학교를 찾아보고, 지역사회와 연결된 생태운동을 벌이고, 먹거리를 짓는 농부의 마음을 배우고, 각종 엔지오 단체에서 인간의 꿈이 가진 시행착오를 몸으로 겪어내면서 공공의 선에 대한 저마다의 가치관을 만들어가 볼까. 세계각지로 배낭여행을 떠나거나 가까운 고아원이나 양로원에서 멋진 공연을 하거나 도서관에 모여 열린 토론을 해볼까. 어때? 얘들아.

간단치 않은 이야기들을 유쾌하게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열렬하게 인문학의 향기를 향유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를 물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꿈꾸는 아이들. 그 아이들을 부산의 학원가에서 만났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인 <인디고 서원>. 빼곡한 입시학원들 사이에 자그마하고 참 예쁘게 뿌리내리고 있던 인디고 서원에는 참고서와 문제집과 학원교재가 없었다. 출판자본이 끊임없이 창출하는 세칭 베스트셀러도 없었다. 청소년을 겨냥한 기획출판물도, 판매 전략으로 선정되는 청소년 필독서도 없고 쉽게 풀어 쓴 고전 따위도 없었다. 참고서가 없는 청소년 서점에서 나는 오랜만에 행복했고, 꿈 꿀 권리를 찾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서 미래라는 말의 가장 아름다운 발성이 왜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지 다시 생각했다. 인디고 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참 멋진 동지들께 파이팅을 보낸다. 전국의 작은 도시들에 참고서가 없는 청소년 서점들이 줄장미넝쿨처럼 흐드러지면 참, 참 좋겠다.


김선우/시인
시인 김선우씨가 소설가 공선옥씨에 이어 이 란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꾸밈없고 여운 깊은 글을 보내온 공선옥 작가는 “조용히 호흡이 긴 글을, 좀 더 제 내부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쓰는 시간을 갖고 싶다며 기고를 마무리했습니다.

김선우씨는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96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이 있으며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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