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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각/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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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가을밤 연애편지 태우던 이들 모두 어디로 사라졌나?
공기가 오염되어서? 강물이 탁해져서?
아님 무례한 심성 때문? 코스모스에 물어본다
녹색 에세이/달려라 냇물아
중학생 시절 어느 가을철, 사촌형이 우리집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다. 하루는 밤이었는데, 당시 대학생이던 형이 마당에서 뭔가를 태우고 있었다. 솥을 올려 빨래도 삶고 개밥도 끓이던 이동식 함석 아궁이에 무엇인가 천천히 넣어 태우며 형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웅크리고 앉은 형의 널찍한 등에 가을 달빛이 내려앉았던 것 같다. 형이 부르던 노래를 당시에는 잘 몰랐다. 나중에 좀더 커서 그 정갈하면서도 맑은 멜로디를 근거로 그 노래를 부러 추적해 알아본즉, 형이 부르던 노래는 이기순님이 작사하고 이홍렬님이 작곡한 가곡 ‘코스모스를 노래함’이었다. 35년쯤 지난 세월인데도 그토록 멋진 제목의 가곡이 이 땅에서 불려졌다는 게 문득 신기한 일로 여겨진다.
‘달 밝은 하늘 밑 어여쁜 네 얼굴 달나라 처녀가 너의 입 맞추고 / 이슬에 목욕해 깨끗한 너의 몸 부드런 바람이 너를 껴안도다 / 코스모스 너는 가을의 새아씨 외로운 이 밤에 나의 친구로다 //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고요타 내 마음 더욱 더 적막하여지니 / 네 모양도 더욱 더 처량하구나 고요한 이 밤을 너 같이 새니 / 코스모스 너는 가을의 새아씨 외로운 이 밤에 나의 친구로다’
형은 그때 연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형이 마당에 웅크리고 앉아 노래를 부르며 태우던 편지는 누구로부터 받았던 편지였을까. 실연을 당했던 것일까.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르기도 했지만, 알아낼 재간이 없는 일이긴 하다.
근래에는 때없이 피기도 하지만 가을에 코스모스가 피면 나는 어린 날의 ‘가을밤 사촌형’이 생각나고, 그가 부르던 소박하면서 애잔한 가곡이 생각난다. 애절한 전설이나 꽃말도 제대로 거느리지 못한 코스모스는 신이 꽃을 만들 때 가장 먼저 작업에 들어갔던 습작품이라 한다. 신은 국화를 맨 나중에 만들었다던가. 꽃의 족보야 어찌됐든 중요한 일은 그날 밤 마당에서 형은 그 노래를 참으로 맑고 처연한 목소리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후일, 신문사에 근무하던 형은 지체 높은 여인이 어느 기념일에 총에 맞아 돌아가신 뒤 이 나라를 떠났다. <우상과 이성> 같은 책에 밑줄을 긋던 사촌형은 자신이 알게 된 진실과 발표된 내용과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한국사회를 떠나고 말았지만, 오늘 나는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어느 가을밤, 등 뒤에서 어린 아우가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가 부르던 노래, 그 노래를 만든 세대의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정서와 그 정서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던 시절에 대해 말하고자 할뿐이다. 달나라 처녀, 이슬에 목욕한 꽃의 부드러운 몸을 껴안는 바람, 적막한 가을밤 처량하고 외로운 나를 꽃의 친구로 삼는 센티멘탈리즘이 오늘 문득 이토록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지금은 아무도 코스모스를 이렇게 노래하지 않는다. 지금은 아예 아무도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공기가 오염되어서일까, 흐르는 강물이 탁해져서일까. 적막한 가을밤에 연애편지를 태우던 젊은이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얼마 전, 리영희 선생님의 <대화>를 읽다가 홀연히 놀란 구절이 있다. 아무리 권력이 진실을 왜곡하고 온 나라를 병영화하고 공포를 방편으로 증오심을 재생산하더라도 균형감각을 지니고 이성적으로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시대의 주인,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오로지 그 한마디 말, 그 말을 하기 위한 지식인의 자발적 책무에 평생을 투신한 리영희 선생이 의외로 ‘한국인의 심성’에 대해 깊은 혐오와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계셨다. 6.25를 겪으면서 산천의 파괴뿐 아니라 전에 그나마 지녔던 민족의 좋은 심성과 꿈 전부가 깡그리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은 “어떤 이유나 명분으로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고 합리화될 수 없다”고 단언하셨다. 그는 설사 “통일을 가져온다고 해도 전쟁은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전쟁을 찬양하고, ‘군사적 대립을 국가와 국민의 상시적인 삶의 기본정신으로 강조’하고, ‘증오와 적대의 원시적 동물적 감정의 선동’을 일삼는 무리들에 대해 정말 울고 싶은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성 (속에) 냉혈적이고 잔인함의 어떤 유전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어요”라고 개탄하고 계셨다. 선생의 카랑카랑하지만 탄식이 밴 목소리가 마치 책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이승만 정권 붕괴 뒤 등장한 박정희 쿠데타에 이어 몇 해 전까지 이어진 군사정권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선생은 프로이트보다는 차라리 칼 융을 원용하며 절망적인 ‘민족적 유전자’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었다. 이른바, ‘집단적 생존의 역사적 유전론’이 그것이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인간적 행위도 다 면책되는 폭력적 심성의 유전 가능성 말이다.
한 시대를 지성의 힘으로 관통하면서 남다르게 과학적 현실인식을 유지했던 어른이 오죽하면 유독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렸을 때에는 계량할 수도, 소상하게 밝혀낼 재간도 없는 절망적인 유전론까지 들먹이셨을까. 누구보다 ‘우리’의 모습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면밀하게 살핀 사람만이 기댈 수 있는 가설로서의 인간론이 아닐 수 없다. 환경운동 또한 파괴의 실태파악과 그 복구와 재발방지를 위한 운동의 내용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일이 ‘지금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총체적 반환경적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우리의 거칠고 무례한 심성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라고 본다.
좀더 인간적이고 나은 세상, 좀더 투명하고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경향과 다른 유형의 노력과 싸움이 있을 것이다. 환경·생명운동 또한 마찬가지다. 그게 물 만난 얼토당토 않는 직업이나 단순한 정의감이 변형된 습관의 일이 되기 전에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에서 한 치도 떨어져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을 들판이나 강둑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약하고 여린 코스모스를 노래하지도 못하면서 쫓기듯 구르는 삶은 사실, 매우 비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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