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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6 17:01 수정 : 2005.10.07 15:13

조시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04년 11월16일 백악관에서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후임에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명한다고 발표한뒤 그의 볼에 키스를 하고 있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이듬해 1월18일 열린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외교의 시간이 오고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AP연합

부시 2기 선두에 선 라이스 국무 처음엔 북 두고 “폭정의 전초기지” 강경 곧 현실파·네오콘 합친 ‘실용적 이상주의’로 힐 대표 운신 폭 넓혀주고 정권 고위층과 거중조정 물밑작업 6자회담 북핵문제 타결로 결실 이젠 탈냉전 아시아 재편에 대응태도 관심

포커스

“외교의 시간이 오고 있다.”

2005년 1월18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 지명자는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1기 때의 일방주의적 외교에서 탈피해 동맹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2월 첫 순방지로 유럽을 택한 라이스는 대서양을 건너와 이라크 침략으로 야기된 깊은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화합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는 북한문제 등에서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부시 1기 행정부 취임 1년 뒤인 2002년 ‘깡패국가’로부터 ‘악의 축’으로 격상됐던 북한은 이 청문회에서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부시 대통령은 며칠 뒤 있은 2기 취임식 연설에서 전세계적으로 폭정에 맞서 싸우겠다고 호언했다. 북한이 6자회담의 재개 시점을 미루고 2기 부시행정부의 정책방향을 지켜보겠다고 하던 때였다. 2월 마침내 북한은 4차 6자회담의 무기한 불참과 핵무기 보유 발언으로 맞섰다. 흔히 외교는 전쟁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하듯이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진 미국은 외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외교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의 외교 전문기자 글렌 케슬러는 7월 라이스 국무장관의 부시 2기 외교를 ‘실용적 이상주의’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1기 부시 행정부의 외교는 워싱턴 내에서 분열돼 있었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부시는 실용적 노선을 추구한 파월 전 장관의 국무부 ‘현실파’ 보다는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국방부와 딕 체니 부통령 진영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손을 자주 들어줬다. 케슬러는 실용적 이상주의가 이 둘을 연결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첨예한 대립과 양자택일의 현실에서 ‘실용적 이상주의’가 설 자리는 분명치 않아 보였다.

북핵문제는 그 시험대였다. 라이스는 북한이 요구한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에 대한 철회와 사과를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3월 유럽에 이어 아시아 순방에서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또 물러선 건 아니지만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말은 신중하게 피했다. 3월 중순 <워싱턴타임스>와의 회견에서 그는 “내가 진실을 말했다는 데 대해 어떤 의심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다. 뛰어난 협상가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있었지만, 힐 차관보에게 파월 시대에는 금기시되던 북미 비공개 양자접촉을 갖도록 권한을 부여한 것도 라이스였다. 케슬러의 표현대로라면 ‘실용적 이상주의’가 작동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워싱턴 내부만을 놓고 보면 그건 부시가 이번엔 라이스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6월10일 백악관 한-미 정상회담은 이를 보여준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양쪽 배석자들과 함께 1시간여 오찬을 했다. 워싱턴의 한 고위 외교소식통은 전한 오찬 내용 가운데는 이런 뼈있는 농담이 있었다. 부시 대통령이 옆자리의 라이스 국무장관을 가리키며 “라이스가 나보다는 합리적”이라고 말하고는, 럼스펠드 장관을 보면서는 “이 사람보다는 내가 더 합리적”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부시 대통령이 4월29일 취임 100일 기념 백악관 특별기자회견에서 내놓은 북한에 관한 메시지는 강경하면서도 다소 모호한 것이었다. 그는 미국은 다른국가들이 동의할 경우 북핵문제를 유엔 안보리로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6자회담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외견상 강경하지만 `다른 국가들이 동의할 경우'라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6자회담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말에 무게를 둘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 때만해도 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위험한 폭군'으로 언급했다. 따라서 5월 말 기자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미스터 김정일로 부른 것은 단순한 호칭의 변화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파월이었다면 안됐을 것”

5월31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의 이 회견은 한달 전과 달리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는 미국은 북한 핵문제를 외교로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할 것이라면서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외교(해법)가 효과를 내기를 원하며 외교가 작용할 기회를 줘야 한다. 그것이 효과가 있기를 희망하며 그럴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미국) 정부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10일 뒤 한-미 정상회담 오찬장에서 있은 부시의 농담은 이런 메시지를 함축한 것이었다.

<뉴욕타임스>의 9월20일치 북핵관련 사설은 “외교가 작동하다(Diplomacy at Work)”였다. 타임스는 정책이 바뀐 데는 라이스 국무장관의 공이 가장 크고 미 수석대표로 협상에 임한 힐 국무차관보의 예외적 수완도 일조를 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도 같은 날 미국 고위 외교관리의 말을 인용해 경수로 문제로 4차 6자회담이 막판 기로에 섰을 당시 최종 결정은 부시 대통령이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라이스 장관이 6자회담 수석대표인 힐 차관보와 미 정부 최고위급 관리들간의 가교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포스트의 케슬러는 라이스가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국가안보보좌관을 거쳐 최고 외교사령탑에 오른 키신저 이후 첫 국무장관이란 사실 때문에 더욱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파월 국무장관이 물러나고 국가안보보좌관인 라이스가 후임으로 내정됐을 때 언론은 “비둘기(파월)가 떨어지고 매(라이스)가 날았다”고 비유했다. 많은 이들은 파월이 나가게 되면 미국의 외교정책을 왜곡시킨 네오콘에 반대하던 마지막 저지선이 무너질 것으로 우려했었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6자회담의 한 핵심 당국자는 9·19 공동성명을 놓고 9월18일 밤 미 수석대표인 힐 차관보가 중국의 5차 초안을 좋은 제안이라며 수용의사를 밝힌 걸 두고 이렇게 말했다. “미 국무장관이 라이스가 아니라 파월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이스의 역할은 베이징에서 4차 6자회담 2단계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9월12일 공개된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한다면 북한을 위한 많은 것들이 검토되고 있다”며 “미국,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이스 장관은 또 “이제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는 만큼 우리는 북한을 존중한다. 우리는 그들과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라이스는 아버지 부시 밑에서 외교정책 보좌관으로서 소련 해체와 베를린장벽 붕괴의 역사적 사건을 지켜봤으며, 아들 부시 밑에서는 안보보좌관으로서 9·11사태 수습과 이라크전쟁을 지켜봤다.

무력 대신 외교로 풀다

지난 1월 라이스는 네오콘의 존 볼턴 국무차관 대신 로버트 졸릭을 국무부 부장관에 기용했다. 그와 졸릭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각각 백악관과 국무부에서 미-소의 탈냉전과 독일통일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입안했다. <워싱턴포스트> 출신의 국제정치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는 탈냉전기 미소 외교를 다룬 역작 <전환(Turn)>(<역사를 바꾼 정상들의 대도박>으로 번역됨)에서 1989년 12월 초 몰타 정상회담 당시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버지 부시는 12월1일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미 순양함의 사령관실에서 보좌관들에게 고르바초프와 그의 개혁운동을 도와줄 구체적 조처를 취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시와 베이커는 국가안보회의 보좌관들인 로버트 블랙윌과 콘돌리자 라이스(러시아 담당), 국무부 고위관리인 데니스 로스와 로버트 졸릭에게 대통령이 몰타 정상회담에서 내놓을 미국의 방안들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뉴스위크>의 분석에 따르면 부시 1기 정부에서 무역대표부 대표로 근무하면서 동아시아 문제에 깊숙이 빠져든 졸릭은 미국과 중국의 국익이 양립 가능하다는 굳은 신념으로 적극적인 대중국 접근 정책을 펴고 있다. 그 졸릭 부장관이 중국을 전담하면서 지난 8월부터 미국은 중국과 북핵 문제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장래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라이스는 스탠포드대 동료이자 현재 자신의 특별고문인 필립 젤리코와 ‘독일 통일’에 관한 책을 공동 저술하기도 했다. 라이스, 젤리코, 졸릭은 탈냉전의 유럽과 독일통일 문제를 직접 다루면서 팀웍을 다졌다. 미국이 탈냉전의 질서를 어떻게 다뤄나갈지를 아는 정책팀이라 할만하다. 힐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포함한 라이스의 국무부팀은 이제 한반도의 핵을 넘어 탈냉전의 아시아 문제에 뛰어들 채비를 갖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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