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06 17:34
수정 : 2005.10.07 15:13
역사로 보는 한주
1974년 10월8일 2차대전 이후 일본 역대 총리 가운데 최장수 집권(1964.11.-1972.7.) 기록을 남긴 사토 에이사쿠(1901.3.-1975.6.)에게 노벨 평화상 수상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은 수상기준이 불명확하고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비판을 받아온 노벨상의 권위에 또 한차례 치명타를 가했다.
노벨 평화상은 다국간의 우호나 군비 철폐·삭감, 평화교섭 진행 등에 큰 공헌을 했거나 할 것으로 기대되는 개인이나 단체에 준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있다. 사토는 1967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핵무기는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이른바 ‘비핵3원칙’을 제시하는 등 평화지향 외교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수상했다. 그러나 그는 65년 미국 방문 때 당시 린든 존슨 미 대통령에게 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한 이상 일본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기밀해제된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회의록), 그 뒤 실제로 핵무기 제조연구에 동의했으며, 일본의 비핵정책에 대해 “난센스”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핵무기 반입 금지 표명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실은 미군 함정이 수시로 일본 항구를 드나든 사실이 나중에 확인됐고, 사토는 애초부터 그것을 허용하는 쪽으로 미국과 밀약한 사실도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미국의 부도덕한 베트남전 개입을 전면 지지했으며, 일본의 미군 보급기지 역할을 자임했다. 그에 대한 수상 결정이 “노벨상위원회가 범한 최대의 오류” 가운데 하나였다는 평가가 내려진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의 총리 취임 다음해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65년 한-일협정)에도 베트남전 본격 개입과 냉전체제 강화를 노린 미국의 계산이 작용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노벨 평화상이 기리는 ‘평화’가 주로 누구를 위한 평화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이 외에도 73년의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1906년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의 수상을 들 수 있다. 키신저는 칠레 아옌데 정권 붕괴공작, 인도차이나 융단폭격 등에 깊숙이 개입했음에도 (무산된) 베트남전 종결협상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조선지배를 보장한 루스벨트는 그 토대가 된, 러-일전쟁 종전 중재(일본에 유리하게) 노력을 이유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역대 수상자들 출신지역이 주로 어딘지만 살펴도 알조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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