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06 17:59
수정 : 2006.02.22 19:46
아깝다 이책
거실에 커다란 텔레비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퇴근을 하면 소파에 누워 정규방송이 끝날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또 보았다. 손에 리모콘을 든 채 잠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다음날이면 전날 밤에 본 프로그램 얘기로 하루를 시작했다.
어느 날 내 손에 낡은 책 하나가 들어왔다. <텔레비전의 제거를 위한 네 가지 논의>. 지은이는 낯설었고 표지도 조잡했다. 그러나 그 책 속에는 과학기술에 대해 잔뜩 회의를 품은 고집쟁이의 열정이 들어 있었다. 그는 급진주의자였고 운동가였다. 그는 한때 유명 기업을 상대하는 잘 나가던 광고쟁이였다. 그런 그가 텔레비전을 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바로 출간을 결심하고 그가 몸담은 단체로 연락을 했다. 한국에서 이 책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대해 그는 꽤나 호의를 보였다. 1978년에 미국에서 초판이 나온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또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텔레비전의 해악성에 대한 공감이 커져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나 스스로가 이제 텔레비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고 싶던 차였다. 출간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마침 한 대학선생이 이 책으로 강의를 하기도 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책을 편집하는 동안 텔레비전을 버렸다. 집안에서 소파가 사라졌고 텔레비전 장식장은 친구의 집으로 옮겨졌다. 제리 맨더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니 집안에 텔레비전을 두는 것은 자신과 가족을 파괴하는 행위처럼 보였다. 정신의 파괴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망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집요하게 인간의 육체적 기능을 퇴화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당연하게도 이 ‘과학적 논증’이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텔레비전이 많이 버려질 것이라고 믿었다. 제리 맨더는 텔레비전의 해악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와 상담하고 수집한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논증을 했기 때문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만큼 이 책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독자들은 냉담했다. 무슨 헛소리냐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공감은 하지만 그건 실현 불가능한 얘기라는 반응도 있었다. 내가 떠들고 다니는 얘기는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어 있는 현실을 무시하는 급진주의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텔레비전에 빠진 아이들을 데리고 숲속에서 사흘을 머물렀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첫날 답답해하던 아이들은 하루가 지나면서 자연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자신의 귀로 풀벌레 소리, 냇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온통 기계음에 물들어있던 아이들이 인간의 원래 상태인 자연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기계와 함께 하면서 인간의 건강성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퇴화되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까.
위력적인 매체에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인지도 모른다. 제리 맨더는 그것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반세계화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텔레비전을 없애지 않고 개혁하자는 것은 총기를 없애지 않고 개혁하자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는 인디언을 사랑하고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굳이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할 필요를 못 느낀다. 다만 텔레비전 때문에 일상이 흔들리고 파괴되고 있다는 느끼는 분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텔레비전이 사라진 집이 어떻게 혁명적으로 변하는지 직접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김재범/도서출판 우물이 있는 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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