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10.06 18:07 수정 : 2005.10.07 15:14

우리말의 탄생
최경봉 지음. 책과함께 펴냄. 1만4900원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결성 대장정 표준어 근거된 ‘서울에 사는 중류층’ 108명 발기 철자법 놓고 “문법대로” “표음대로” 7년간 공방 정작 뜻풀이는 언중의 말보다 직관 의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원고 실종 해방뒤 되찾아 12년만에 ‘우리말사전’ 완간

우리말 사전은 미치지 않고는 못 만든다. 작업량이 워낙 방대하고 다뤄야 할 분야가 다기할 뿐더러 그 과정이 길고 지리하여 여간한 정성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치는 대상이 ‘우리’일 수도 있고 ‘말’일 수도 있으며 그 모두일 수도 있다.

‘말’에 방점을 찍으면, 말이 지식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문명의 사고(史庫)’를 채운다는 자부심과 이어질 터이다. ‘우리’에 강조점을 둔다면, 잃은 나라를 다시 찾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도정과 일치할 터이다.

<우리말의 탄생>(책과함께 펴냄)은 ‘우리말 사전’을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1945년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조선어학회의 원고뭉치를 되찾은 사건은 사전 만들기의 지난함을 상징한다. 13년에 걸쳐 집적한 자료가 소위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법원으로 운송되다가 실종되었던 것. 곡절 끝에 이 자료는 1945~1957년 여섯 권의 ‘큰 사전’으로 완간되었다. 걸린 기간이 길기도 하려니와 일제의 지배, 해방, 남북분단, 전쟁 등 현대사의 시련을 고스란히 관통하고 있다. 그러하니 그 사연으로 책 한 권을 엮고도 남지 않겠는가.

해방공간에서 첫째 권이 나왔을 때 천도교회관(조선어학회)과 기독교청년회관(조선문학가동맹)에서 잇따라 출판기념회를 연 사연,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들이 모아 일본에 바치기로 되어있던 국방헌금 82만원을 특별기금 형식으로 기부받아 출판의 씨돈으로 삼은 일 등은 특기할 만한 것 중 하나다.

우리말 사전 만들기 대장정은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뜨면서 시작된다. 총독부에서 만든 것을 포함해 외국인이 만든 대역사전이 고작인 현실에서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에 의한, 조선어사전’의 요구는 컸다.

발기인 108명은 식민사회에서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춘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자들. 무지한 민중을 계몽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발기인이 성분은 추후 ‘서울에 사는 중류층이 사용하는 조선어를 표준어로 정한다’는 원칙이 세워진 것과도 연관된다.


표준어사정위원 절반이 경기 출신

조선어학회의 사전 작업은 우회과정을 거치는데, 총독부의 철자법 개정 작업에 적극적으로 간여해야 했던 사정 때문. 담당자들은 ‘규범은 국가 혹은 그에 준하는 기관의 권위에서 나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터. 조선어학회는 1936년까지 맞춤법,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 등을 제정하는데 진력한다.

조선어학회는 엄격한 문법 원리에 입각한 형태주의 철자법을 건의하고 심사위원으로 적극 참여한 결과 자신들의 소신을 관철시켰다. 이에 표음주의적 옛 철자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반발이 일고 상당한 기간동안 격렬한 논쟁이 뒤따랐다. 철자법이 학문과는 무관한 ‘사회적인 약속’이란 점에서 소모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사전편찬작업이 지연되었다는 평가다.

<큰사전>은 편찬위원회 발기 이후 28년만에 여섯 권으로 완간되었다. 무엇이 이렇게 방대하고 지리한 작업은 가능하게 했을까. 이 작업이 나라 되찾기와 새나라 만들기의 시기에 걸쳐있는 것은 ‘나라’가 그 동력이 아니었을까 추론하게 만든다. 사진은 1935년 1차독회를 마친 표준어사정위원회.
“과거의 모든 문명민족이 제가끔 자기 어문의 표준을 확립하기 위하여 표준어와 표준문자를 제정하며, 동시에 표준사전을 편성하여 어문의 통일을 도모하였고 금일의 중국과 토이기의 신흥민족들은 종래의 문자가 합리적이 못되고 실제적이 못되어 문화 보급에 막대한 장애가 있음을 통절히 느끼어 신문자를 제정하는 바요…”(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 조선어편찬회가 구상한 사전이 언어 사용의 편리성과 언어 규범의 정립에 초점을 두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표준어사정위원 73명 중 37인이 경기출생(서울 36)이고, 나머지 36인은 도별로 인구비례에 맞춘 것, 표준어 결정권을 경기출신자한테만 주고 지방출신이 이의를 달면 재심토록 한 것 등은 ‘표준어의 정의’에서 비롯되었다. 토론이 신중하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단 표준어로 결정되면 그것은 강제되고 나머지는 죽을 운명인 까닭. 조선어학회는 1936년 10월28일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6111개 어휘를 발표했다.

다음은 단어의 뜻 정하기. 철자법과 표준어에 진을 뺀 어학회는 정작 이 대목에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 결과로 사전에는 표제어의 용례와 그 출전이 없다. 지은이는 “조선어로 된 고전의 개념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탓은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객관적인 문헌이나 언중의 말에서 취재하기보다는 회원들의 지식과 직관에 의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에 나온 북한판 <조선말대사전>이 용례를 들고 출전을 밝히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점과 비교된다.

다음으로 지적되는 것은 노골적인 동어반복적 정의가 많이 눈에 띈다는 것.

가까스로 [부] 간신히, 겨우

겨우 [부] 어렵게, 힘들이어, 가까스로, 근근히

통상 사전 만들기에 앞서 굳이 풀이할 필요가 없는 기본어휘 2000여개를 선정해 두고 이를 바탕으로 뜻풀이를 하는데, 조선어학회는 이를 몰랐거나 간과한 결과다.

이 점에서 ‘우리말 사전’ 만들기는 ‘말’보다는 ‘우리’에 방점이 찍혔다고 평가된다.

조선어학회의 대부인 주시경은 대종교로 개종하였고, 회원인 김두봉, 이극로, 안호상이 대종교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윤재의 호 환산(桓山)은 환인 환웅의 후예라는 데서 유래를 둔다. 예비작업에 해당하는 광문회의 ‘말모이’ 전문용어 가운데 종교관련 약호 가운데 대종교가 가장 앞에 있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덧붙일 것은 사전 만들기의 공을 조선어학회가 오로지할 수 없다는 점.

방언·어휘 수집 조력자 많아

학자로 치면 이봉운, 지석영, 주시경 등의 선각자들이 있었고, 향리에서 방언을 수집해준 교사와 학생들이 있었다. 특히 송도고등보통학교 조선어 담임교사였던 이상춘은 그때껏 수집해 풀이한 9만여 어휘 모음을 제공하여 사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익을 뒤로 하고 협력한 출판업자들과 종이와 잉크를 제공한 록펠러재단도 한몫 거들었다.

사전 만들기는 궁둥이가 무르도록 진득해야 하는 만큼 환각이 필요한 터. ‘말’이라든가 ‘우리’가 일종의 환각제가 아니겠는가. 이제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큰사전>의 큰 맥을 이은 또다른 환각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2009년 출간을 목표로 남북한 통일사전인 <겨레말 큰사전>이 그것이다.

낙수 한 가지. 조선어학회의 작업 중간에 출간되어 ‘종잇값을 올린’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은 태반이 이윤재가 만든 재료와 원고를 바탕으로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카드작업을 하다가 이씨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자 문씨 혼자서 자료와 명예를 독차지해 버렸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