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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6 18:35 수정 : 2005.10.07 15:14

정길화/문화방송 홍보심의국장

언론인 꿈꾼 대학 1년 도입부 에피소드 재밌어
미팅 자리서 애용 언론 허상 꿰뚫은 자성 공감
숱한 이사에도 살아남은 27년 책꽃이 지킴이

나는 이렇게 읽었다/J.L. 세르방 슈레베르 ‘제4의 권력’

옛날 두 탐험가가 공룡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놀라 달아나려 할 때 그의 동료가 “걱정말게. 저 공룡은 풀을 먹는 초식동물이야”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도주하면서 “나도 그건 알고 있는데, 공룡이 그걸 알까 모르겠네”라고 답했다.

두 탐험가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줄행랑을 놓았겠지. 공룡은 필경 브라키오사우루스쯤 될 거야. 그래야 초식공룡이거든. 가만, 인간과 공룡이 같은 시대에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이거 공갈 아니야? (그때는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도 나오기 전이다)

달을 가리키면 마땅히 달을 봐야 하겠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하면 범인과 선지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들머리의 이 대목은 J.L. 세르방 슈레베르 <제4의 권력>의 3부 ‘정보과잉 시대’중에 나온다. 이 책을 읽을 당시는 1978년.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았지만 사실 쥐뿔도 모르는 대학 1년 시절이었다. 저자의 깊은 뜻은 짐짓 모르는 체, 도입부의 얘기가 재미있어 그 뒤로 미팅자리에까지 가서 이 에피소드를 즐겨 써 먹은 기억이 있다.

J.L. 세르방 슈레베르가 가리킨 달은 언론기업의 실상과 허상이다. 언론기업의 내막은 무엇인가? 언론기업은 왜 자신의 내막을 공개하려 하지 않는가? 언론기업은 화폐제조업인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루크>, <라이프>와 같은 세계의 언론왕국은 왜 몰락했는가? 광고는 필요악인가? 누가 언론인을 좋아하는가? 언론은 구제받을 수 없는가? …자못 진지하고 심각하다. 들머리의 공룡 얘기도 ‘정보의 공유가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저자의 변죽일 뿐이다.

갓 대학에 입학한 내가 비록 장차 꿈을 언론 또는 그 언저리로 삼고 있었다 해도 그 당시 이런 질문들이 실감났을 리는 만무다. 아마도 외국인의 저술이긴 하지만 언론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음에 흥미를 느꼈음직하다. 그리고 언론이 자타칭 권력을 칭하고 있음에 호기심이 있었을 것이다. <제4의 권력>은 한 선배가 대학신입생인 내게 사준 책 중의 하나였다. 언론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책이야 고전적인 불후의 명저들이 허다하건만 그 후 27년이 넘도록 그 숱한 이사와 짐줄이기에도 이 책은 아직 내게 남아 있다.

<제4의 권력>은 76년에 프랑스에서 출판되고 2년 뒤인 78년 한국에서 번역된 책인데 무엇보다 세계 굴지의 언론왕국 렉스프레스 그룹의 젊은 경영자이자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언론의 역기능과 부작용을 진지하게 자성하는 그 문제의식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언론의 내막과 매카니즘을 빤히 들여다보며 미디어의 정보산업적 측면이 가진 허상을 통찰한 것이다. 그런 중에서 “모든 매체는 광고가 매체를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광고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나 “광고보다 더 냉혹한 예술의 후원자는 없다” 등의 말은 지금 들어도 현실감이 있다.

한편 1970년대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목도 보이는데 가령 “비디오카세트와 유선방송에 의해 텔레비전의 풍요가 예상되지만 사람들은 기술발달과정과 대중화간의 차이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다분히 뉴미디어의 출현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저자가 온갖 뉴미디어가 범람하고 텔레비전조차 사양화를 걱정하고 생존의 위기를 논하는 작금의 한국적 상황을 보면 무엇이라고 말할지 궁금해진다. 나아가 언론이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않은 채 권력적 지위를 참칭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본다면 뭐라고 할지도 사뭇 궁금하다.

슈레베르의 문제의식은 신선하지만 그 시선은 30년 전 프랑스에 머무르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책은 한국에서 일찍 절판이 된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쓴 책은 롱펠로가 허공에 대고 쏜 화살처럼 시공을 넘어 여기 한 사람의 뇌리에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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