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글찻집
동서양 두루 ‘ㄹ’ 소리를 즐겨쓴다. 혀끝을 잇몸에 가볍게 댔다 떼면서 내는 소린데, 이를 흐름소리·혀옆소리·굴림소리라고 한다. 인류가 저마다 만들어 쓰는 말글 가운데 ‘ㄹ’ 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데가 없을 듯싶다. 로마자만 해도 엘(L, ㄹㄹ)과 아르(R, ㄹ)가 있을 정도니 알조다. 그 소리가 가볍고 자연스러운 까닭에 시·노래와도 잘 어울린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이른바 머리소리(두음) 법칙이라 하여 ‘ㄹ’ 소리가 말 첫머리에 오는 것을 꺼려 ‘ㄹ’로 시작되는 말이 거의 없다. ‘ㄴ’이나 ‘ㅇ’으로 변했거나 첫소리 아닌 데, 토씨·씨끝·받침 따위로 쓰인다. 그런데도 전체 자모별로 자주 쓰이는 순위를 보면 1위가 홀소리 ‘ㅏ’이고, 2위가 ‘ㄹ’이며 ‘ㄱ’이 3위로 나온다.(유재원·‘역순어사전’ 부록) 물론 닿소리(자음) 19개 가운데서는 ‘ㄹ’이 단연 1위이며, 그 비율은 전체의 10%에 가깝다. 여기에 겹닿소리 열한개(ㄺ·ㄻ·ㄼ·ㄽ·ㄾ·ㄿ·ㅀ·ㄳ·ㄵ·ㄶ·ㅄ) 중 일곱개에 ‘ㄹ’이 들어 있다. 우리말 속의 ‘ㄹ’의 위치를 알만 하다. 최근 원로학자 정재도 님이 <우리말의 신비 ‘ㄹ’>(지식산업사)이란 책을 펴냈는데, 여기서는 ‘ㄹ’을 다른 볼모로 살피고 있다. 곧, ‘ㄹ’이 들어가 만들어진 말들을 들추어 일일이 사물의 뿌리와 잇대고 있다. 그것도 컴퓨터 처리 아닌 슬기와 발품의 소산인 게 놀랍다. 나라잃은 시대인 1940년 무렵 안창호·안호상·이극로·이윤재·이인·이은상 들이 선비를 기른다는 뜻의 ‘양사원’이란 기관을 만들어 운영할 당시 ‘3ㄹ 운동’을 내걸었는데, ‘3ㄹ’이란 곧 ‘얼·말·글’을 일컬었다. 이는 일종의 ‘광복 운동’이었으나, 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든 활동이 멈추고 만다. 저자는 여기에 ‘불’을 덧붙여 ‘얼·말·글·불’을 벼리로 삼는다. 이를 사람 몸, 사는 길, 사는 곳, 사는 틀로 나누어 ‘ㄹ’ 말들을 길어올려 한눈에 보여준다. “나라가 온통 ‘ㄹ’로 비롯했다. ‘ㄹ’(하늘)의 ‘ㄹ’(아들)이 ‘ㄹ’(밝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ㄹ’(당골)이 ‘ㄹ’(아사달)에 ‘ㄹ’(서울)을 정했다. ‘ㄹ’(하늘)의 정을 받은 ‘ㄹ’(버들)의 ‘ㄹ’(알)에서 주몽이 태어난다. …”말 깨치는 아이들이 읽어 ‘3ㄹ’이 성한 사람으로 만들만 한 이야기다. 최인호 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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