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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6 18:46 수정 : 2005.10.07 15:15

불량직업 잔혹사
토니 로빈슨·데이비드 윌콕 지음. 신두석 옮김. 한숲 펴냄. 1만8000원

구토물수거인·갑옷담당 종자 대청 염색공·무두장이… 고대부터 빅토리아왕조까지 수많은 밑바닥 직업 ‘하류인생’ 문명의 진정한 주역이지만 철저히 천대받고 잊혀졌던 그들의 수난사를 진기한 시각자료와 함께 재현

16세기 영국 튜더왕조 시대, 가톨릭교회와의 결별을 불사하며 앤 불린과 결혼한 헨리 8세. 6명의 왕비와 결혼·이혼을 거듭한 그는 그러나 불과 얼마 뒤 엘리자베스 공주(나중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를 낳은 이 두번째 왕비 앤에게 간통죄 등의 혐의를 덮어씌워 처형해버린다. 그때 그가 제물로 골라 앤의 간통 상대로 몰아친 인물은 자신의 변기담당관 헨리 노레이스 경이었다.

영국 왕실 변기담당관의 역할은 왕의 배변 뒤 궁둥이를 닦아주고 배변내용물 검사 뒤 처방까지 하는 ‘지저분하지만 추앙받는 자리’였다. 왕의 궁둥이에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고위 귀족들에 한정됐고, 대변담당관은 왕의 방 열쇠꾸러미를 지닌 채 가장 사적인 순간에 왕을 독대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위험한 자리이기도 했다. 그는 겹으로 짠, 흡수성 좋은 직물인 다이어프 천으로 왕의 배변 뒷마무리를 했다. 기저귀를 뜻하는 영어 ‘다이어퍼 diaper’는 거기서 나왔다.

인분 속에서 일한 ‘공 파르메’

1501년부터 1600년까지 1세기간 런던의 인구는 400%나 불었다. 당시 런던이 직면한 가장 큰 두통거리 가운데 하나는 오물처리였다. 건물 아래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위에서 쏟아버리는 인분이나 쓰레기더미에 종종 봉변을 당했다. 런던 시는 공중화장실 보급에 나섰고 정화조 청소부인 ‘공 파르메’들을 엄격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공 파르메들은 인분이 무릎이나 허리까지, 심지어 목에까지 차는 환경에서 일했다. 그들 다수가 악취와 유독가스에 찌들어 희생됐다.

당시 인디고라는 염료가 동양에서 수입되기 전까지 청색 염료의 유일한 공급원은 ‘대청’이라는 식물 추출물이었다. 이 대청염료 추출공정은 너무 불결하고 냄새가 심해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이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 대청염색공의 작업을 금지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이 머무는 곳을 중심으로 8㎞ 이내에 대청염색공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법령까지 공포했다. 그러나 그들 염색공은 숙련된 장인이요 영국 화학공업의 선구자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영국 튜더조의 역사는 이런 변기담당관이나 공 파르메들, 대청염색공들의 ‘드러나진 않지만 중요한’ 역할이 없었다면 성립될 수 없었다.


해가 지지 않는다던 번영을 구가한 19세기 빅토리아조의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의 눈부신 경제 및 기술 발전 이면에는 급속히 증가한 인구 가운데 특권층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가 겪었던, 타락으로 얼룩진 절망적인 삶이 은폐돼 있었다. 산업혁명의 토대였던 광대한 철도망 건설에는 박봉과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했던 건설인부들의 고달픈 삶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고,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 한 단면이 드러난 빈민구제 수용소의 비참한 생활, 석탄재 수거인, 넝마주이, 하수관 및 진흙탕 수색꾼, 그리고 무두장이들의 기막힌 인생이 번드르한 영국 역사를 사실상 지탱했다. 피혁가공에 종사한 무두장이들의 지옥같은 삶이 없었다면 밭갈이도, 기병대도, 필사본, 그리고 가죽벨트로 동력을 전달했던 산업공장들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20세기 초 런던 지역 무두장이들의 작업 모습. 빅토리아 시대의 무두장이들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가죽에서 털을 뽑고 지방조직을 제거하고 있다. 지독한 악취와 지루하고도 힘든 노동을 참아내야 하는 그들의 사투가 없었다면 ‘대영제국’의 번창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한숲 제공
현재 영국 ‘채널 4’의 고고학 시리즈물 <타임 팀>의 사회자로 활약 중인 토니 로빈슨, 텔레비전 프로듀서로 로빈슨과 공동작업중인 데이비드 윌콕이 함께 쓴 <불량직업 잔혹사>(The Worst Jobs In History)(한숲 펴냄)는 이처럼 우리가 배운 역사가 얼마나 피상적이며 일면적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등장하는 각 시대마다의 다양한 ‘최악의 직업들’의 면면들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문명을 창조하고 역사를 이끌어왔다고 평가받는 위대한 인물들의 뒤에는 항상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어려 있고, 이런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희생 위에 역사의 바퀴는 굴러온 것”이며 “이들이야말로 명시적으로 기록되지 못한 문명의 창조자들이자 역사의 주체라고 해야 할 것”(서문)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어찌 영국의 역사만 그러하겠는가. 우리가 배운 한국사와 세계사 역시 얼마나 피상적이며 일면적인가.

갑옷담당 종자 ‘똥 같은 삶’

중세 기사의 시종은 어린 소년들이었는데, 그들은 갑옷담당종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생활은 말 그대로 “똥 같은, 똥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흔히 폼도 근사한 기사들끼리의 싸움이 금방 끝나는 걸로 묘사되지만 실제 싸움은 몇시간이 지나도 쉽사리 끝나지 않았고, 혼란과 공포속에 용변볼 시간도 없어 “갑옷 바깥에서는 말과 사람의 피와 진흙이 튀겼고, 갑옷 안은 말할 것도 없이 (땀과 오물범벅으로) 더욱 끔찍했다.” 갑옷담당종자라는 직업은 이 더럽기 짝이 없는 갑옷을 벗기고 기사에게 포도주 한 잔을 바친 뒤 안팎에 떡칠해진 오물들을 깨끗이 손질해 다시 입혀 다음 전장 근처까지 모시고 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싸움의 실제 주역이자 주로 희생당한 쪽은 기사들이 아니라 그들이 데리고 다니던 ‘하류인생’들이었다.

스튜어트조 때 화약재료를 만들었던 초석장이들은 토양 속에 오랜 시간 묻혀 있는 동안 질산칼슘과 질산나트륨으로 분해된 사람·동물의 ‘질 좋은’ 오줌·똥을 얻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동원했으며, 국왕은 그들에게 아무 집이나 들어가 여기저기 파헤쳐도 좋다는 특권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특히 “여인들이 자리에 지린 오줌이 질 좋은 초석 재료가 된다”며 당시 예배가 장시간 계속됐던 (그래서 오줌을 지릴 수밖에 없었던) 교회 무단출입 및 채취 허가까지 얻어내려 하는 등 갖은 방도를 궁리했다.

책은 고대 로만 브리튼과 앵글로색슨 시대의 농민·수도사·필사본 채식사·바이킹선 운반인 등에서부터 중세의 축융업자·거머리잡이·이발외과의, 튜더왕조기의 사형집행인·핀 제조공·여자 생선장수, 스튜어트 왕조의 물장수·서캐잡이·흑사병 매장인·바이올린 현 제조인, 조지왕조의 뮬 정방기 청소부·모델, 빅토리아왕조의 성냥 제조공·굴뚝 청소부·쥐잡이꾼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의 하류인생들의 삶을 진기한 시각자료들과 함께 재생해낸다.

‘20 대 80’ 사회구조와 이주외국인노동자 등을 떠올려 본다면 21세기인들 뭐가 크게 다르랴 싶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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