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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직업 잔혹사
토니 로빈슨·데이비드 윌콕 지음. 신두석 옮김. 한숲 펴냄. 1만8000원 |
구토물수거인·갑옷담당 종자 대청 염색공·무두장이… 고대부터 빅토리아왕조까지 수많은 밑바닥 직업 ‘하류인생’ 문명의 진정한 주역이지만 철저히 천대받고 잊혀졌던 그들의 수난사를 진기한 시각자료와 함께 재현
16세기 영국 튜더왕조 시대, 가톨릭교회와의 결별을 불사하며 앤 불린과 결혼한 헨리 8세. 6명의 왕비와 결혼·이혼을 거듭한 그는 그러나 불과 얼마 뒤 엘리자베스 공주(나중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를 낳은 이 두번째 왕비 앤에게 간통죄 등의 혐의를 덮어씌워 처형해버린다. 그때 그가 제물로 골라 앤의 간통 상대로 몰아친 인물은 자신의 변기담당관 헨리 노레이스 경이었다. 영국 왕실 변기담당관의 역할은 왕의 배변 뒤 궁둥이를 닦아주고 배변내용물 검사 뒤 처방까지 하는 ‘지저분하지만 추앙받는 자리’였다. 왕의 궁둥이에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고위 귀족들에 한정됐고, 대변담당관은 왕의 방 열쇠꾸러미를 지닌 채 가장 사적인 순간에 왕을 독대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위험한 자리이기도 했다. 그는 겹으로 짠, 흡수성 좋은 직물인 다이어프 천으로 왕의 배변 뒷마무리를 했다. 기저귀를 뜻하는 영어 ‘다이어퍼 diaper’는 거기서 나왔다. 인분 속에서 일한 ‘공 파르메’ 1501년부터 1600년까지 1세기간 런던의 인구는 400%나 불었다. 당시 런던이 직면한 가장 큰 두통거리 가운데 하나는 오물처리였다. 건물 아래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위에서 쏟아버리는 인분이나 쓰레기더미에 종종 봉변을 당했다. 런던 시는 공중화장실 보급에 나섰고 정화조 청소부인 ‘공 파르메’들을 엄격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공 파르메들은 인분이 무릎이나 허리까지, 심지어 목에까지 차는 환경에서 일했다. 그들 다수가 악취와 유독가스에 찌들어 희생됐다. 당시 인디고라는 염료가 동양에서 수입되기 전까지 청색 염료의 유일한 공급원은 ‘대청’이라는 식물 추출물이었다. 이 대청염료 추출공정은 너무 불결하고 냄새가 심해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이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 대청염색공의 작업을 금지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이 머무는 곳을 중심으로 8㎞ 이내에 대청염색공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법령까지 공포했다. 그러나 그들 염색공은 숙련된 장인이요 영국 화학공업의 선구자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영국 튜더조의 역사는 이런 변기담당관이나 공 파르메들, 대청염색공들의 ‘드러나진 않지만 중요한’ 역할이 없었다면 성립될 수 없었다.해가 지지 않는다던 번영을 구가한 19세기 빅토리아조의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의 눈부신 경제 및 기술 발전 이면에는 급속히 증가한 인구 가운데 특권층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가 겪었던, 타락으로 얼룩진 절망적인 삶이 은폐돼 있었다. 산업혁명의 토대였던 광대한 철도망 건설에는 박봉과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했던 건설인부들의 고달픈 삶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고,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 한 단면이 드러난 빈민구제 수용소의 비참한 생활, 석탄재 수거인, 넝마주이, 하수관 및 진흙탕 수색꾼, 그리고 무두장이들의 기막힌 인생이 번드르한 영국 역사를 사실상 지탱했다. 피혁가공에 종사한 무두장이들의 지옥같은 삶이 없었다면 밭갈이도, 기병대도, 필사본, 그리고 가죽벨트로 동력을 전달했던 산업공장들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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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런던 지역 무두장이들의 작업 모습. 빅토리아 시대의 무두장이들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가죽에서 털을 뽑고 지방조직을 제거하고 있다. 지독한 악취와 지루하고도 힘든 노동을 참아내야 하는 그들의 사투가 없었다면 ‘대영제국’의 번창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한숲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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