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어떤 스님이 동산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쇠 가시로다. 천하의 납승들이 뛰어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동산 스님이 말했다. “삼(麻) 세 근이다.” [분명히 떨어진 짚신이다. 괴목나무를 가리켜 (악담을 하고는) 버드나무를 꾸짖는 꼴이구먼. 저울질을 하는구나.] 이 공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이는 참으로 씹기가 어려워 입을 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담박하여 맛이 없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부처에 대한 답변을 제법 많이 했다. 어떤 이는 “대웅전 안에 계신 분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삼십이상을 갖춘 분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장림산 밑에 있는 대나무 지팡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산 스님은 “삼 세 근”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옛사람의 혓바닥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고 하겠다.사람들은 흔히들 이말저말 둘러대어 “동산 스님이 그때에 창고에서 삼을 저울질 하는데 어떤 스님이 이를 물었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하기도 하고, “동산 스님이 동문서답을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또 “그대가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물었기에 동산 스님이 우회해서 대답했다” 하기도 한다. 더 썩어빠진 놈들은 “이 삼 세 근이 바로 부처다” 하니, 전혀 관계가 없다 하겠다. 너희들이 만일 이처럼 동산스님의 말을 더듬거렸다가는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참구하여도 꿈에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말이란 도를 담는 그릇인데 옛사람의 뜻은 전혀 모르고 다만 말만 따지니 어찌 핵심이 있겠는가? 듣지 못하였는가? 옛사람의 “도란 본디 말이 아니나 말로 말미암아 도가 나타나는 것이니, 도를 깨닫고 나서는 곧 말을 잊어야 한다”라는 말을. (선림고경총서 백련선서간행회, <벽암록 (상)>, 장경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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