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06 19:38
수정 : 2005.10.07 15:17
저출산은 보육정책 때문이고
낙태율은 남아선호 때문이고
성형수술 이면에 남성중심 시각 있다
이를 여성 탓 하는 것은 ‘가차 저널리즘’이다
세설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 있는 세 가지 순간이 있다. 첫째는 ‘먹이’가 걸렸을 때, 둘째 작별할 때, 셋째 적이 급소를 보였을 때. 이 가정에 따르면, 진지한 인격은 자기 밥그릇을 양보하며 생색을 내고, 초면의 친절이나 아첨보다 작별의 예의를 중시하고, 상대가 급소를 보이면 전의가 연민으로 바뀐다. 물론 이 길은 멀고 험난하다.
경제성을 아는 인간은 비용에 비해 단기 이윤이 최대인 ‘위선’을 택한다. 내 먹이를 축내지 않는 립 서비스와 ‘치-이-즈’ 포즈로 세상의 시선을 받아내고, 초면의 아첨을 작별의 순간에 적의로 돌려놓고, 적이 급소를 보이면 이쑤시개로라도 찌른다. 위선을 전략으로 삼은 인간은 확실히 경제적이다. 하지만 이 단기 효율의 잔머리로 세상을 속이는 건 잠시다. 배가 고파진 맹수가 발톱을 드러내듯, ‘경제적 인간’은 본전을 까먹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사회의 인격 수준도 평화 시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위기가 닥쳐 계층과 집단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 사회의 표면을 봉합하던 위선의 가면이 찢어지고 적나라한 속살이 드러난다.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쓸고 간 건 집과 사람만이 아니다. 미국이 뒤집어 쓴 민주주의라는 위선의 가면도 거기에 포함돼 있다. 이라크를 번개처럼 요리하던 그 조직력과 기술은 다 어디로 갔는지, 부시 대통령은 사태 발생 이틀 뒤까지 휴가를 즐겼단다. 언론도 정부의 책임보다 생존을 위한 이재민의 약탈에 더 초점을 맞추었으니 딱한 일 아닌가. 이 지역의 주민 대부분이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었어도 이랬을까? 흑인들은 고의적인 ‘하드 타임’을 주고 있다고 분개했다. 어찌됐던 이번에 미국이 전 세계에 보여준 건 ‘그들만의 민주주의’, 급소를 드러낸 상대에게 발톱을 들이미는 맹수의 모습이다.
다행히 한국은 허리케인도 인종갈등도 없다. 맹수의 발톱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 얼마 전 인터넷에서 신문 기사를 읽다가 “한국 여성 지구촌 ‘불명예 1위’ 싹쓸이”란 대단한 제목의 기사와 마주쳤다. 내용인즉슨 “ 최저출산율을 비롯한 ‘성형수술’과 ‘제왕절개’, ‘흡연’, ‘이혼율’, ‘낙태율’ 등에서 세계 최고”라는 것이다. 더 대단한 것은 이 현상이 “여권이 신장되고 남녀 평등사상이 보편화되면서 나타난 우리 사회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최저 출산율은 최근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가 지적했듯이 보육 등 정책부재 탓이지 여자 탓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낙태율이 높다는 것은 한국 남성이 콘돔을 싫어하고, 시부모가 딸을 달갑게 생각 않는다는 거다. 성형은 여성이 자기만족을 위한 것도 있지만 이조차도 남성의 시각적 쾌락을 최종 결재자로 가정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성형수술 과잉에 대한 원인제공자는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보는 남성적 시선의 즉물적 성격이라고 봐야 한다. 이 시선은 업무의 내용과 관계없이 ‘용모 단정한 여성’이라는 구인 조건을 아직도 내걸고 있을 만큼 만연해 있다. 제왕절개의 비율이 과도하게 높은 것은 과잉 의료행위 탓이 크다. 하지만 여기에 맞장구치는 소비자의 ‘미용 욕구’도 한몫하는 것 같다. 이 ‘미용 욕구’ 역시 최종 결재자는 남성의 촉각적 쾌락이 아닐까?
이혼은 여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남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 사고는 남자가 먼저 치고 이혼은 여자가 먼저 제안한다. 흡연율은 여성의 증가 추세가 확연하지만 남성 흡연율과 비교하면 여전히 남성이 압도적이다. 김형경의 단편 ‘담배 피우는 여자’를 보면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건 삶이 힘들고 고독하기 때문이다. 그 고독은 응시당하면서 이해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고독이다.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그런데 왜 이런 통계 수치들이 하나로 엮여서 ‘여성의 불명예’로 조합되는가. 그리고 더 웃기는 건 이게 어떻게 여권 신장과 남녀평등 사상이 보편화된 결과인가. 여권과 남녀평등과 관계가 있다면 그게 떠도는 말만큼 일상적 현실에서 아직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그 이유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발톱을 감춘 맹수의 포즈로 여성을 대하는 인격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성이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수컷의 발톱은 영락없이 여성을 향한다.
저널리즘 용어 중에 ‘가차(gotcha) 저널리즘’이란 게 있다. ‘gotcha’는 ‘I got you’의 준말로 우리말로 ‘너 잘 걸렸다’ ‘딱 걸렸어’ 정도의 어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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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일/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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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 저널리즘’은 정치인이나 저명인사의 사소한 말실수나 당황해 하는 행동 등을 흥미 위주로 사안의 맥락과 관계없이 과장해서 보도하는 행태를 말한다. “한국 여성 지구촌 ‘불명예 1위’ 싹쓸이” 같은 기사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가차 저널리즘’은 정치적 의도보다는 상업적 목적과 관계가 있지만 한국 신문에서는 간혹 특정 정치적 의도와 결부되기도 한다. ‘노통 때리기’도 ‘가차 저널리즘’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평론가 제리 랍딜은 "가차 저널리즘은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언론의 암세포 같은 존재“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가차 저널리즘이 암세포인 이유는 사회적으로 위임받은 권리를 자신의 먹이를 추구하는 맹수의 발톱으로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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