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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13 15:59 수정 : 2006.02.06 17:21

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문화인류학과

‘면세 구역’은 의무 자유로운 해방구
VIP석은 정말 중요한 사람임을 확인해준다
경계와 경계를 통과할때 ‘아바타’ 변신
창공은 투명한 존재의 ‘바탕화면’
거기서 국민으로 호명되지 않는
나를 ‘클릭’ 한다

‘비행기 태워준다’는 말이 있다. 칭찬이나 아첨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해준다는 뜻인데, 비슷한 말에 ‘띄워준다’가 있다. 또한 ‘들뜬다’, ‘기분이 업(up)된다’ 등의 표현도 흥분과 희열의 감정을 가리킨다. 외국어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위쪽으로 올라가는 동작과 즐거운 느낌 사이에는 긴밀한 연상 회로가 있는 것이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비행기를 타는 경험도 그러하다.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 멀리 날아갈 때 우리의 마음은 들뜬다. 애니메이션 ‘스노우맨’의 주제가 ‘Walking in the Air'에서 묘사되는 경쾌한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국제공항은 특별히 그런 기분을 농밀하게 자아낸다. 항공망이 지구촌을 하나로 엮어내는 ‘월드와이드웹’이라면, 공항은 그 소통의 관문 곧 ‘포털 사이트’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그 회색지대를 통과할 때 우리는 새삼 국적을 의식하며 이방인의 아바타로 변신한다. 한국을 벗어난다는 것 그리고 외국으로 나간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해방감, 그리고 낯선 곳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국제공항은 특정 국가의 영토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그 바깥에 존재한다. 말하자면 국경과 국경 사이의 공백 지대다. 출국 신고를 마치고 나면, 여객들은 묘연한 무중력 상태에 접어든다. 숨 가쁘게 달려가던 시간은 느긋하게 굴절된다. 탑승권을 지니고 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도착지의 시간으로 자신의 손목시계를 미리 조정해놓기도 한다. 그래서 승객들을 지배하는 시간은 행선지에 따라 제각각으로 분화되고 표준 시각은 비행기가 출발하는 순간 그 효력을 상실한다. 특정한 시간이 적용되지 않는 국적 불명의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은 업무와 인간관계 그리고 사회적인 책임 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듯하다. 승객들이 들고 있는 쇼핑 비닐 백에는 ‘Duty Free(면세)’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쓰여 있다. 국내에 얽힌 수많은 일들과 그 ‘의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공간이 외국 여행이 아닌가. 하지만 그 홀가분한 ‘해방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승객들은 예외 없이 신발 까지 벗어서 짐과 함께 X(엑스)-레이 카메라에 투과시켜야 하고, 몸의 구석구석 검사를 받아야 한다. 모두가 잠재적 테러범으로 의심받는 것이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하는 불편함은 점점 커지는 듯하다.

국제공항은 그 안에서 웬만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시설을 내포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의 예를 보면, 어린이 놀이방, 유아 휴게실, 사우나, 환승 호텔, 약국, 의료센터, 서점, 기도실, 비즈니스 센터, 정보통신센터, 구두 닦는 가게 등이 있다. 이 별천지에 잡상인이나 홈리스들은 얼씬거리지 못할 뿐 아니라, 빈궁한 차림의 사람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화장실의 청결도는 최고 수준이고 미세먼지나 소음의 공해도 적은 편이다. 공항은 그렇듯 매우 위생적으로 구획화되어 관리된다. 또한 항공사 직원들의 친절함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한다. 디자인의 격조에서 깍듯한 손님 대접에 이르기까지 극진한 정성이 가득 담겨 있는 곳이 바로 공항이다. 승객들은 여기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빈이 된 듯 뿌듯함을 느낀다.

그런데 승객들 안에도 몇 가지 부류가 있다. 짐을 잔뜩 가지고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출국의 초보자일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단출한 가방을 메고 편안한 모습으로 수속을 밟는 사람은 베테랑일 것이다. 그것은 여권에 찍힌 도장의 개수와도 비례할 것 같다. 또한 승객들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수준의 차이는 좌석의 급수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라는 ‘클래스’가 정확하게 나뉜다. 이코노미석에서의 장거리 여정은 고역이다. 노약자들은 ‘이코노미석 증후군’이라는 신체 이상을 주의해야 할 정도로 좌석이 비좁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비즈니스나 일등석은 널찍하게 몸을 눕힐 수 있고, 승무원에게서 일류 호텔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뿐만 아니라 그 ‘귀빈’들에게는 탑승 전에 공항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프레스티지’가 주어진다. 그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자신이 정말로 ‘매우 중요한 인물(VIP : Very Important Person)’임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외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밟는 과정에서는 그러한 구별과 위신도 빛을 바랜다. 거기에서는 국적을 가장 중요하게 인지하고, 그래서 심지어 몇몇 선진국에서는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멸적인 대우를 받기도 한다. 입국심사대 직원이 방문 목적을 까다롭게 캐묻고 귀국 항공권을 보여 달라면서 자신을 잠재적 불법 체류자로 취급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한국 공항에서 더욱 굴욕스러운 대접을 받으며 설움을 겪는 외국인과 해외 거주 동포들이 훨씬 많다. 결국 공항은 국적별로 글로벌 급수를 확인받는 검열의 장치다.

비행기 좌석의 등급이나 소속 국가에 대한 국제적 평판은 사람의 값어치를 얼마만큼 좌우하는 것일까. 국경을 넘들나면서 그 사소한 차이들을 가뿐하게 해탈하고 싶다. 비행기에서 마주치는 무변(無邊)의 창공, 그 존재의 투명한 바탕화면에서 ‘국민’으로 호명되지 않는 ‘나’를 클릭해 보고 싶다. 집과 동네와 나라를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면서 오히려 자아를 깊숙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제도로 규정되거나 어떤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본연의 모습이 참으로 존귀한 인격으로 클로즈업된다. 그렇게 빈 그릇으로 지구촌 시민들을 만날 수 있다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VIP로 다가올 것이다. 공항은 그런 마음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빈(空) 항구(港)다. 하늘을 비상하면서 우리는 허공 속에 묻어 두었던 평심(平心)을 불러들이고 삶과 세상을 드넓은 여백으로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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