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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
이인식 황상익 등 지음. 고즈윈 펴냄. 1만1000원 |
학교 안팎에서 서로 먼산보듯 하더니
인문학도 위기고 이공계도 위기다
인문사회계는 게으르고
과학기술계는 사회적 고민이 없다
교류와 소통으로 유기적 지식인이 절실하다
우리사회에 ‘두 문화’의 벽은 얼마나 공고한가?
학교 울타리 안에서 이과와 문과는 뚜렷하게 구분되고, 학교 밖 사회에서 또 학문영역에서도 이과와 문과의 ‘정신’은 서로 먼산 바라보는 꼴이다. 위기마저도 ‘두 위기’다. 돈 되고 주목받는 실용학문을 좇고 기초학문이 소외되면서 일어나고 있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인문학의 위기’와 2000년대 이후 ‘이공계의 위기’는 별개의 문제로만 각자 영역 안에서 얘기되고 있잖은가?
출판사가 이름붙인 ‘과학논객’ 9명이 함께 지은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고즈윈 펴냄)는 인문사회과 과학기술 사이에 깊게 패인 골짜기에 교류와 소통의 다리를 놓자는 본격 제안이다. 무관심과 오해를 걷어내려면,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이 서로 비판논쟁을 벌이는 한국형 ‘과학전쟁’이라도 필요한 때라는 소망마저 이 책은 내비친다. 이필렬 방송통신대 교수(과학사), 이상욱 한양대 교수(과학철학),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 백욱인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 박병상 풀꽃세상을위한모임 대표, 송성수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최경희 이화여대 교수(과학교육)가 필자로 참여하고, 오세정 서울대 교수(물리학)가 서문을 썼다.
일부 글들은 참신한 기획 의도에서 다소 벗어나 있거나 ‘경계를 넘어라’라는 명령어법에 걸맞는 치열한 분석과 성찰의 뒷심 부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 책이 도드라지는 것은 이 책이 문과와 이과의 경계 구분에 너무도 익숙한 우리사회에 필자들이 정색을 하고 던지는 ‘새로운 인문주의’ 출현의 예고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계 무너진 현실 직시해야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흔히 말하듯 문과 계열의 교육을 받는 이들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필자들이 인문사회와 과학기술 분야 모두에 새로운 인문주의를 주문하고 있으니, 이과의 교육과 사고방식에 익숙한 이들에게도 새로운 인문주의는 필요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래서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과학기술 시대에 과학기술의 이해와 인문사회의 성찰을 모두 갖춘 지식인들이다.
‘문과의 집’과 ‘이과의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이들이여, 이과와 문과의 경계가 무너지는 집밖의 현실에도 눈을 돌리자, 필자들의 주장은 이쯤 되는 듯하다.
필자들은 우리사회 인문사회 분야의 지적 게으름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필렬 교수는 완곡어법을 피해 “한국 인문학자들의 자연과학 이해 수준은 그들이 인간배아복제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논의를 하지 못한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며 현실 과학에 대한 인문사회의 지적 빈곤을 공박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해할 마음이 없는 인문학은 “한국사회를 지적인 빈곤상태로 방치하고, 일순간에 한쪽으로 쏠리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보는 그는 이런 분위기가 한국 과학자의 지적 성취에 환호하는 과학기술 민족주의를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기후변화 탓에 이젠 서울에서도 자라는 대나무를 보며 푸근함을 노래하는 시는 생태시가 아니라 자연과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는 반생태시임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예시는 눈길을 끈다. 시인의 생태적 감수성도 과학기술의 이해를 외면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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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양 돌리의 탄생과 그 이후 생명공학의 발전은 과학기술과 인문사회의 두 문화에 생명윤리를 중심으로 한 논쟁적 담론 교류의 계기를 본격적으로 마련했다. 사진은 복제양 돌리와, 1998년 출산한 새끼 양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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