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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13 17:23 수정 : 2006.02.06 17:24

커피견문록
스튜어트 리 앨런 지음. 이창신 옮김. 이마고 펴냄. 1만7000원

커피 역사 좇아 지구 3분의 2 훑은 견문록
수천년 전 에디오피아선 커피콩 따먹어
유럽에 건너와 카페를 낳았고
그곳서 꽃핀 토론 문화는
민주주의·언론·금융 꽃피워
“20C 철학사조까지 커피에서 비롯돼”

깊어가는 이 가을, 커피 한잔 어떠신가? 모카, 카푸치노, 아니면 아메리카노?

근데, 사람들은 언제부터 커피를 마셨을까? 한번쯤 이런 의문이 들지는 않겠는가. 개중에 정색하고 커피의 역사를 찾아보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누군가 옛 ‘커피의 길’을 따라가면서 진실을 캐보겠다며 짐을 꾸린다면 미친 놈 취급하지 않을 텐가? 스튜어트 리 앨런이란 사내가 꼭 그짝이다.

커피향 풍기며 종교의식 거행

그가 발품으로 남긴 기록 <커피견문록>(이마고 펴냄)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커피는 본디 마신 게 아니라 먹었다. 지금의 이디오피아 왈로족이 처음으로 커피를 먹은 오로모족의 후손이다. 15000~3000년전 케파의 밀림지대, 라이벌 봉가족의 포로가 된 오로모족은 고지대인 하레르 노예시장에서 팔려나갔다. 이들이 가져온 동그랗고 거친 로부스타 원두는 고지대에 적응해 길쭉하고 향이 풍부한 아라비카 원두가 됐다. 왈로족은 주술능력이 뛰어나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최근까지도 주술사의 무덤에 커피나무를 심는 풍습이 있던 것으로 미루어 커피가 주술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하레르의 원두는 동쪽으로 홍해까지 나간 뒤 오늘날 모카커피의 고향으로 알려진 예멘의 항구도시 알모카에 도착했다. 1200년경 알샤드힐리라는 이슬람 수행자가 처음으로 커피를 끓였다고 추정되는 곳이 바로 이곳. 커피무역으로 번성한 이곳은 궁전이 줄지어 있었고 왕자들은 황금방석에 앉아 수많은 노예를 부렸다. 수피교의 한 분파인 샤드힐리 추종자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돌면서 커피향을 풍기며 종교의식을 거행했다. 터키가 예멘을 정복한 1400년대에 이르러 모카에서 나온 커피가 이슬람 세계에 널리 퍼졌다. 이야기는 진지하기가 모카커피 맛이다.


예멘 출신의 시바 여왕이 솔로몬 왕한테 건넨 향료 가운데 커피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솔로몬이 그날 밤 여왕을 덮쳤고 이로써 콩이 최음제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게 유일한 증거.

터키의 오스만 제국 술탄 가운데 가장 악독했다는 무라드 4세(1612~1640). 미복으로 시내를 돌다가 카페에서 정부를 비난하는 광경을 보고 커피와 물담배를 금지시켰다. 이를 어겨 목이 잘린 사람이 10만명이라나. 이로 인해 커피상인들이 국외로 눈돌려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로 커피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683년 30만 터키군이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했다가 패퇴하면서 낙타 2만5000마리도 버렸다는데, 등에 실린 10여개의 원두콩 자루가 빈에 최초의 카페를 여는 재료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유럽의 아침식사 ‘크루아상과 커피 한잔’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밤늦게 일하던 제빵업자가 터키인들이 땅굴을 파는 소리를 듣고 이를 시 당국에 알렸고 이들은 나중에 터키 국기에 나오는 초승달 모양을 본뜬 ‘피처’ 빵을 만들어 자신의 공적을 선전한 바, 이 빵을 커피와 함께 먹는 것이 빈의 아침식사가 되었다. 한세기 뒤. 빈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결혼하면서 향수병에 걸린 그가 프랑스 제빵업자들에게 피처 만드는 법을 가르쳤고 새롭게 붙여진 이름이 ‘초승달’이라는 뜻의 ‘르 크루아상’이다.

‘크루아상과 커피한잔’ 시작된 빈

요페의 법칙. “나쁜 커피는 팽창주의 제국주의, 좋은 커피는 평화와 관용.” 유럽에서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였던 독일은 1차세계대전을 일으켰고 히틀러는 카페가 아닌 술집에서 추종자를 모았다. 폭탄제조술이 뛰어난 미국의 커피맛은 지독했는데 맛좋은 커피점 스타벅스가 생긴 이래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나. 그림은 커피를 나르는 아라비아 여성.
오스만 제국에서는 남자가 아내에게 커피콩을 충분히 대주지 못하면 이혼을 당해야 했던 반면, 1600년대 말 유럽에서는 그 반대였다. 런던의 한 여성단체는 런던시장한테 커피를 금지해 자신들의 성 생활을 보호해 달라고 탄원했다.

“영국 신사들은 지난 800년동안 혈기왕성한 사나이로 수많은 아들딸의 아버지 노릇을 해오면서 기독교 국가 가운데 가장 능력있는 남성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놀라운 성적 위업이 종말을 고하려 한다. 커피라는 야만적 음료가 정액을 말려버리는 바람에 남성들은 몸에 물 한방을 남지 않은 채로 콧대만 높아졌고 단단한 것이라고는 관절밖에 남지 않았다.”

사뭇 카푸치노 맛같은 얘기다.

1680년경 런던 ‘로이즈 커피하우스’라는 커피점. 걸핏하면 배가 난파하던 시절 로이즈는 단골인 선주 몇 사람과 배가 항구에 무사히 도착할 지를 놓고 내기를 걸었다. 배가 무사하면 로이즈가 돈을 따고 배가 가라앉으면 로이즈가 그 손실을 물어주기로. 배들은 위험이 제거된 상태서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영국이 세계 최대의 상선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이즈는 나중에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인 런던로이즈로 다시 태어났다.

술취한 유럽 아침 깨운 커피

술취한 유럽의 아침을 깨운 것도 커피. 당시 유럽은 아침에는 맥주, 점심에는 에일맥주, 저녁에는 흑맥주을 마셨고 런던은 건물 일곱개 중 한개꼴로 술집이었다. 커피를 수프처럼 떠먹기도 하고 겨자, 박하, 삼페인을 쳐먹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유럽에서는 커피문화가 정착돼 기근과 역병이 사라지고, 정부의 민주화가 가속되고.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문맹률이 낮아졌다.

이쯤되면 커피는 예찬을 넘어 역사를 움직인 동인으로 상승하는데….

커피를 독점하던 시절 아랍문명이 융성했고, 오스만제국이 커피콩을 손에 넣으면서 강력한 국가가 되었고, 영국은 커피가 출현하면서 세계지배에 시동이 걸렸으며, 프랑스혁명이 태동한 곳도 파리의 카페이며, 미국이 차 대신 커피를 마시면서 권력이 옮겨왔다. 잘 나가는 일본은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에 빠져있다. 믿거나말거나.

20세기 철학도 별 것 아니다. 입체파, 초현실주의, 실존주의의 특징은 지루함. 자린고비 프랑스인이 가욋돈 10프랑을 아끼려고 아주 적은 양의 독한 커피를 앞에 두고 며칠이고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또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된 사드 후작이 커피를 못 마시게 되면서 변비의 고통을 호소한 외침이 1789년 프랑스혁명을 불렀다나 어쨌다나. 영~ 아메리카노 커피처럼 싱겁다. 이런! 다 식은 커피는 어쩐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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