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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의 발생과 치료를 ‘신’에게서 ‘자연’으로 돌려놓았다. 그림은 작가를 알 수 없는 르네상스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의사가 의학서를 들여다보며 지시를 하자 약제사가 약을 준비하는 동안, 그리스·로마신화의 ‘건강의 여신’인 히게이아가 환자에게 약을 먹이고 있는 것을 히포크라테스 흉상 앞에서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가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미국 국립의학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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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시대 직전에
이성적 철학·과학 융성
그 바탕 위에 ‘전업의사’ 등장했고
‘의학의 어버이’가 나왔다
의학속 사상/① 합리적 의학의 시발(서양):히포크라테스 동서양을 통틀어 근대에 이르기까지 의학자는 곧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다. 의학은 시대의 자연관(과학관)과 철학에 뿌리가 닿아 있다. 히포크라테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서양 의학과 황제내경에서 허준, 이제마에 이르는 우리의 의학 속에 담긴 사상을, 공간을 날줄로 시간을 씨줄로 삼아 엮어본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구약성경 전도서 1장 9절) 나날이 새로운 치료법과 진단술이 쏟아지는 현실에서, 의술에 관해서는 들어맞지 않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의술의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의술 자체’를 생각할 때는 전혀 틀린 이야기도 아닌 듯하다. 곧 전도서가 쓰여지던 기원전 4세기 무렵보다 훨씬 더 전에도 인간들은 의술을 이용하고 있었다. 전도서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도 <고대의학에 관하여>라는 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좋은 증거다. 그러면 의술의 기원은 언제일까? 누구도 명확한 답을 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까마득한 옛날, 인류의 탄생 때부터일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예컨대 손을 다쳤을 때 상처 부위를 반사적으로 입으로 가져가서 입술과 혀로 핥고 침을 묻히거나, 반대편 손으로 그 부위를 꼬옥 누른다. 그러한 우리의 행위는 학습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이고 선천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학습 경험이 없는 어린 아기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데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병들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나름대로 ‘치료 행위’를 한다. 예를 들어 새는 다리를 다쳤을 때 그 부위를 진흙 따위로 문지른다. 침이나 진흙에는 어느 정도 출혈을 멈추게 하거나 통증을 줄이는 성분이 들어 있다. 또 꼬옥 누름으로써 물리적인 효과를 약간이나마 볼 수 있을 것이다. 아기와 새가 그러한 ‘과학적 사실’을 배워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저 무의식적이고 반사적이고 선천적인 행위인 것이다.
치료행위는 타고난 본능 최초의 인류도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였을 것이고, 매우 유치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의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사시대에 살던 우리의 까마득한 조상이 들에 나가 풀을 뜯다가 손을 다쳤다고 하자. 언제나처럼 반대쪽 손으로 상처 부위를 꼬옥 눌렀는데, 마침 그 손에는 방금 뜯은 풀이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피가 빨리 멈추고 아픈 것도 덜했다. 현대인이라면 당장 그 풀에 지혈, 진통 효과를 나타내는 성분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지만 선사시대인은 대번에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치유에 도움이 되는 지식이 축적되었고 치료 효과가 있는 풀, 즉 약초를 채집(농업이 시작되면서는 재배도) 저장하여 필요할 때 사용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오랜 선사시대가 끝나고 역사시대가 시작할 즈음에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등 고대문명 지역의 사람들은 몇백 가지의 약초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선사시대인들이 치료를 위해 약초를 이용한 행위는 오늘날의 의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선사시대 의술의 주류였던 것은 전혀 아니다. 선사시대인들은 다른 현상과 마찬가지로 질병이나 부상도 초자연적인 것으로 여겼다. 비가 내리고 꽃이 피는 것 따위와 마찬가지로 질병과 부상 또한 정령(精靈)이나 귀신에 의한 것이라고 여겼다. 뱃속에 나쁜 정령이 들어와서 배탈이 나고(“병이 든다”는 표현은 아마도 선사시대의 흔적일 것이다) 귀신이 저주하여 다리가 부러진다는 식이었다. 그러면 치료는? 들어온 정령을 나가게 하고 귀신의 저주를 푸는 것이 자연스러운 치료법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더러 남아 있는 무당의 치병 굿과 비슷한 것이었다. 약초에는 병과 상처를 낫게 하는 좋은 정령이나 귀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모습은 문명과 역사시대가 개막되었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욱 세련되었다. 정령과 귀신 대신에 고등종교의 신이 등장하여,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게 되었다. 서양 최초의 문학이라고 일컫는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의 <일리아스>는 역병의 대유행 장면부터 시작된다. 인간들이 자신을 공경하지 않는 데 분노한 태양신 아폴론이 병을 나르는 화살을 쏘아대어 그리스 전역에 역병이 창궐하는 것이다. 역사시대가 시작되고 나서 몇천년이 지나서도 질병의 발생과 치료는 어디까지나 (귀)신의 몫이었다. 사실은 지금부터 몇백년 전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정은 비슷했다. 이러하던 때에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7년?)가 나타나서 그때까지의 주류적인 생각과는 한참 동떨어진 주장을 펼쳤다. 질병은 신이 관여하는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생기는 자연 현상이며 따라서 자연적인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엉뚱한 ‘교리’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사실 역사학자들도 히포크라테스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플라톤(기원전 429~347년)의 <프로타고라스>를 비롯하여 당시와 후대의 기록에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의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구체적 생애와 사상, 활동에 대해서는 또렷하지 않다. 우리는 ‘히포크라테스 전집’(기원전 280년 무렵)과 ‘히포크라테스 선서’(기원전 3세기말)를 통해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에 친숙하지만 그 전집이나 선서와 히포크라테스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 조금 전에 언급한 그러한 주장을 펼쳤는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의 시대 무렵에 그러한 새로운 사상이 뚜렷이 나타난 것은 틀림없다. 요컨대 우리는 히포크라테스를 이 당시 새로운 의학 경향의 의인화된 상징으로 여기면 될 것이다. 성직자 아닌 전업의사 출현 저자가 누구인지는 불명확하지만(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는 여러 명의 저자일 것이다) 100여권으로 이루어진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는 자연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의학사상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신성병에 관하여>를 들추어보자. 현대의학 용어로 ‘간질’인 신성병을 당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신성한 병, 신이 특별히 아끼는 사람에게 내리는 병이라고 여겼다. 그랬기에 로마 공화정 시대의 케사르는 거리낌 없이 신성병이 있다고 했을 터이다.(케사르가 실제로 간질환자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는 놀랍게도, 또 불경하게도 신성병은 신과 관련이 없는 병이라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모든 병이 신과 무관한 자연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히포크라테스를 “의학의 어버이”, 다시 말해 고대 그리스 의학을 현대의학의 뿌리라고 말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현대의학의 자연주의적이고 합리적인 특성이 이때부터 뚜렷이 나타난 것이다. 현대의학의 특성이 지금과 달랐다면 히포크라테스는 별로 중요하게 거론되지 않을 것이며 의과대학들에 많이 세워져 있는 히포크라테스 동상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고대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의술의 특성이 초자연적이었던 데 따라 의료의 시술도 주로 초자연적인 영역을 다루는 성직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들 성직자들에게 의술은 부차적인 업무였다. 그런데 히포크라테스 시대부터 그리스의 여러 지역에서 ‘전업 의사’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이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의사의 원조인 셈이다. 이 점도 고대 그리스 의학이 현대의학의 뿌리라고 하는 중요한 이유다. 이 새로운 전업 의사들의 주요한 근거지는 이오니아 지방의 코스(히포크라테스가 출생하고 주로 활동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크니도스, 키레네 그리고 시칠리아의 크로톤(피타고라스 학파의 거점이다) 등으로 당시 철학과 과학의 중심지이거나 중심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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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익/서울대 교수·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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