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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13 19:27 수정 : 2006.02.06 17:27

미주리 주 에버튼에 있는 마을 정자에서 만난 왕년의 모터사이클 레이서 에드 잉겔스(가운데)와 그를 도와 함께 소방서를 짓고 있는 아들 라이언(왼쪽)과 처조카 앤서니.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22)


원래 미주리 주 마쉬필드(Marshfield)에서 에버튼(Everton)까지 100㎞만 여행하려고 했다. 한낮에 섭씨 40도까지 기온이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잠을 설쳐 몸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140㎞를 달려 지금까지 하루 라이딩으로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 과정이 유쾌했다.

마쉬필드에서 잠을 설친 데는 여러 요인들이 겹쳤다. 먼저 야영하는 곳이 없어 시립 공원 길가 잔디밭에 텐트를 쳤는데 이목이 번다했다. 청소년들이 호기심인지, 악의인지 모르는 눈을 번득이며 지나간다. 몇몇은 텐트 앞을 몇 번이나 왕복하면서 나를 살펴본다. 미 독립기념일이 가까워오면서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주위에 텐트 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찍 잠을 청했지만 머릿속이 더 하얘진다. 밤 10시께 갑자기 환한 불빛의 세례를 받았다. 나가보니 가로 보안등에 불이 들어왔다. 불빛을 피해 텐트를 나무 그늘 밑으로 옮겼는데 바닥을 살피지 않아 뾰족한 나뭇가지들이 등을 찌른다. 밤 12시가 넘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아침 7시께 출발할 때는 이미 수십㎞를 달린 듯 피로했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인구 322명의 작은 마을 에버튼은 미국의 촌락구조로서는 드물게 마을 한 복판에 정자가 있다. 하루 여정을 마칠 야영장으로 가는 길을 아이들한테 묻고 있는데 정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쳐 부른다. 세 사람이다. 가보니 길을 안내해줄 뿐 아니라 큰 물통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준다. 이들은 소방서 건물 신축 공사를 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일꾼들. 에버튼의 다른 건물들은 스러져가고 있고 또 이미 소방서 건물이 버젓이 있는데 새 건물을 짓는 이유가 궁금했다.

오자크고원 끝나고 대평원 시작

“새로 큰 소방차를 구입해서 그것을 집어넣을 건물이 필요하대.”

이 공사를 수주한 하청업자인 에드 잉겔스(Ed Engels)는 자신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답했다. 그를 도와 함께 일하는 두 노동자는 그의 아들 라이언(Ryan)과 처조카 앤서니(Anthony). 가족이 한 팀이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이 뭔가를 기다리며 들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잉겔스는 공구를 발명해서 라이언, 앤서니와 함께 시제품을 만들어 발명품 대행회사인 인벤션 테크놀로지라는 회사에 보냈고 긍정적인 회신이 와서 며칠 전 계약서에 서명했다는 것. 그들은 이 발명품이 시판되면 로열티만 받아도 갑부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더 이상 공사판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여행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얘기들을 쉬면서 주고받고 있었다.

그 발명품이 쇠 같은 것을 깎아내는 기계인 것 같은데 뭐냐고 물어보면 잉겔스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11년 연구의 소산이어서 행여 일이 그르칠까 조심했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난해 11월 발명품을 완성했는데 1년도 안돼 시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그는 시판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인벤션 테크놀로지에 기대지 않고 직접 공구회사 100여 군데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관심 있는 회사를 찾아냈다고 한다. 그의 발명은 신문에도 기사화됐는데 그것도 그가 전화를 걸어서 먼저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것.

에버튼에서 만난 엥겔스가 내기를 걸었다
‘2시간내 41km 달려오면 맥주를 주겠노라’
40도 폭염 뚫고 집까지 쌩쌩
하루 140km 라이딩 신기록을 세웠다
끝내 19분 지각 차디찬 맥주는…

이 벽지에서 한 가족의 팔자를 고칠 만한 발명품이 탄생할 수 있을지 자못 흥미로웠다. 잉겔스도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모처럼 부담 없이 털어놓게 돼서 기분이 좋은지 나를 집으로 초대했는데 조건을 붙였다. 그는 에버튼에서 41㎞ 떨어진 미주리 주 골든 시티(Golden City)라는 곳에 산다. 만약 내가 오늘 5시까지 그의 집에 도착한다면 아이스박스에 넣어둔 찬 맥주를 주겠다고 내기를 걸었다. 그 때가 아직 3시 안 됐을 무렵이었다. 날씨와 지형을 감안할 때 2시간여만에 41㎞를 가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오늘 라이딩을 다 끝냈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하지만 찬 맥주가 기다리고 있다는데 마다할 내가 아니다.

그들은 공사를 재개했고 나는 정신 없이 페달을 밟았다. 그의 집까지 가는 구간에 오자크 고원지대가 끝나고 드디어, 다시 한번 써야 그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는, 드디어 여행을 시작한 이후 내내 기다려온 평평한 대지, 대평원이 시작된다. 세인트 매리에서 오자크 고원이 시작됐듯 펜스버러(Pennsboro)에서 4.8㎞ 서쪽에서부터 분명히 평야가 시작됐다. 오르막으로 거리를 손해보지도, 내리막으로 덕을 보지도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내달려나가는 기분이 좋다.

미주리 주 마쉬필드 시립공원에서 잠을 설쳐 새벽에 일어나 찍은 공원의 한밤 풍경. 불빛에 비친 나뭇잎들이 현혹적이다.
그래도 40도의 폭염이다. “맥주” “맥주” 외치며 힘들게 가는데 뒤에서 차 한대가 따라붙었다. 잉겔스의 트럭이었다. 그들은 공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다. 라이언이 시원한 물을 줄까 제안했지만 시간을 잡아먹을까봐 거절했다가 나중에 후회했다. 더운 맞바람이 분다. 오른쪽 어깨가 쿡쿡 쑤신다. A길에서 37번 길로 우회전했을 때 골든 시티가 4마일(6.4㎞)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페달을 밟는 박자가 빨라진다. 맥주, 맥주. 2마일, 1마일. 그의 집을 찾아서 현관문을 두드리고 시계를 보니 5시19분. 5시까지 와야 맥주를 주겠다는 말이 농담이길 빈다.

스무살 장남 강제로 독립시켜

초등학교 4학년인 딸 대슈아가 활짝 웃으며 문을 열어줬다. 꼭 천사 같다. 잉겔스의 부인 크리스(Chris)는 멕시코 사람이다. 라이언과 대슈아 외에 중학교 1학년인 아들 딜런(Dylan)이 있다. 딜런은 그냥 보기만 해도 즐거운 인물이다. 그 나이에 벌써부터 사냥총으로 메추라기, 토끼, 다람쥐, 뱀을 잡아서 직접 구워먹는다고 한다. 방학 동안 뭐하고 지내느냐고 물으니까 폭죽 터뜨리고 사고 치며 지낸다고 말했다. 수학이 가장 재미있는 과목이라고 말할 때 가족들이 그럼 성적은 왜 그 모양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있는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교까지 다 한 건물에 있는데 전교생 300명이고 한 학년에 20명이다.

스무 살인 장남 라이언은 고교를 졸업했을 때 독립을 강요당했다. 부모는 만약 집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집세를 내라고 해서 그를 쫓아냈다. 대신 1천600만 원짜리 집 한 채 사서 독립할 곳을 마련해줬다. 지금부터는 학교를 다니든 말든 혼자 힘으로 꾸려가야 한다고 했다. 며칠 동안 꾸물거리며 독립을 회피하던 라이언은 마침내 새 집에 안착했다. 그는 저녁식사도 초대해야 와서 먹을 수 있는데 오늘은 초대를 받았다.

엥겔스는 왕년에 잘나가는 모터사이클 선수였다
레이싱은 일종의 마약 아무리 우승해도 성에 안차
18연승 귀 은퇴해버렸다 11년간 개발한 발명품
시판 기다리며 제2의 인생역전 대박 꿈

미국 평범한 가정의 자녀들은 고교를 졸업하면 재정적으로 독립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게 미국이 딴 나라와 다른 특징이다. 영국도 이렇게까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미국도 상류사회에 올라가면 부모의 덕을 보는 경우가 많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그 실례이지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전통은 보통사람들 가운데서 확고하다. 라이언은 대학 1학년을 중퇴하고 지금은 일자리를 못 찾아 아버지 밑에서 일하고 있다. 고속도로순찰대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 잉겔스가 “고교 졸업하면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 나도 그랬다”고 말하기에 어떻게 독립했는지 물어보면서 그의 놀라운 인생사를 들을 수 있었다. 잉겔스는 모터싸이클 프로 선수였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무대에서도 활약했다. 스피드웨이가 주종목으로 400m 코스를 네 번 도는 경기다. 영국에서 활약할 당시 크리스와 결혼했는데 <비비시방송(BBC)>이 결혼식을 보도했을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다. 크리스는 그 때 사진을 들고 와 보여줬는데 한 쌍의 왕자와 공주 같다.

나는 레이서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한다. 촌각을 다투는 승부사들의 세계가 멋있어 보인다. 그는 “머리가 너무 좋으면 위험을 너무 따지기 때문에, 그리고 담력이 너무 세면 너무 덤벼들기 때문에 좋은 선수가 될 수 없다”며 담력과 지력을 적당히 겸비하는 게 우승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참, 19분 늦었지만 너그럽게도 차디 찬 맥주가 끝없이 제공됐다. 저녁도 멕시코 음식인 타코로 포식했다. 다음날에도 초대받아 염치없이 이틀 연속 저녁을 얻어먹으면서 그의 인생에 대해 더 들을 기회가 있었다. 첫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잉겔스가 31살 전성기에 은퇴를 결심하고 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대목이었다. 갈채와 박수를 뒤로 하고 어떻게 목수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레이서 머리 너무 좋아도 꽝

잉겔스는 유럽에서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로 돌아와 레이싱을 하는데 점점 마약에 빠져드는 것 같이 느꼈다. 점점 더 투약량을 늘려야 하듯 아무리 우승을 해도 만족스럽지 않고 그 다음날에는 다음 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는 것. 일주일에 4번 열리는 대회를 그는 18번 연속 우승한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19번째 대회에서 일등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때 참을 수 없이 화가 나 손에 집히는대로 집어 던졌다. 그 때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은퇴를 결심했다는 것.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목수학교를 다니면서 또 독학하면서 난방부터 전기시설, 지붕, 벽체, 바닥, 콘트리트 타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터득했다. 그 일을 하면서 머나먼 오지와 같은 곳인 미주리 골든 시티에까지 오게 됐다. 그러자 이발사였던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이사를 와 앞집에 살고 다른 친척도 이곳에 뿌리를 내려 점차 이 동네가 그의 집성촌이 돼간다.

그는 11년 동안 건축 일을 하는 한편으로 공구를 연구 개발, 상품화를 앞두고 있는 것. 앞으로 두 건의 계약서에 서명하는 일만 남기고 있는데 그는 잘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승부사답게 또 한방의 인생 역전을 노리고 있는 것. 알고 보니 그는 나와 동갑이다.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거의 같은 무렵에 각각 태어나 상반된 인생 궤적을 그리다 내가 자전거를 타면서 한 점-마을 한복판 정자-에서 잠시 두 인생이 수렴됐다. 나는 그와 같은 한방은 없지만 그래도 할말은 있다. 왕년의 레이서면 다냐. 볼록 튀어나온 너의 배를 보면 누가 그걸 믿겠느냐. 기술 개발 못지 않게 중요한 현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힘주어 배를 집어넣으면서 공구 시판만 되면 당장 시정조처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밤 10시께 호스텔로 돌아와 짐을 꾸리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댁에 가 있어 보지 못했던 딜런과 대슈아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했다. 딜런은 엄지손가락을 문지르는 돌을 선물했다. 이거 뭐에 쓰는 거냐고 물으니까 그냥 엄지손가락을 문지르라고 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진다나. 대슈아는 플라스틱 실로 짠 팔찌를 내게 줬다. 잉겔스 가족의 넘치는 환대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는 쿠키 레이디한테서 받은 자전거 배지를 꺼내 대슈아에게 주고 악수했다. 그렇게 건강히, 아름다운 마음으로 자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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