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20 16:25
수정 : 2005.10.21 18:07
역사로 보는 한주
1979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KCIA) 소유 안가에서 이른바 ‘10.26사건’이 일어나기 꼭 70년 전인 1909년 10월26일 일본 메이지 유신의 원훈이자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사살당했다. 당시 일본 실세 원로 추밀원 의장 자격으로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초프를 만나 만주·조선문제를 협의하려던 그는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 의사 총에 맞아 즉사했다.
일본 돈 1천엔 짜리 지폐에 1984년 11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 얼굴이 등장하기 전, 1963년 11월부터 그때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토는 지금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일본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인기있는 인물 가운데 한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뒤틀린 한-일관계를 상징하는 현주소이자 양국관계가 앞으로도 결코 순탄할 수 없을 것임을 예고하는 불길한 낙인, 일본이 새겨놓은 문신과 같은 것이다. 이는 또 한사람의 대표적 ‘정한론자’ 사이고 다카모리(서향륭성)가 일본 역사상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물이 돼 있는 현실과도 겹친다. 일본 근현대의 놀라운 성공의 출발점이자 지금도 일본인 다수의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 돼 있는 메이지 유신이 재물로 삼은 것이 조선이었고, 메이지의 성공이 곧 조선의 실패한 근대, 아니 실패를 강요당한 근대, 그리고 식민지 전락이라는 치욕과 낭패감, 분단으로 대표되는 남루한 현대와 직결돼 있는 모순적 양국 역사가 그 배경에 깔려 있다.
안중근의 거사를 깎아내리려는 쪽은 이토가 한일‘합방’에 찬성하지 않은 인물이었고, 그의 암살은 오히려 일본이 ‘합방’을 서두르게 만들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심지어 이토를 관통한 총알은 제3의 인물의 카빈총에서 발사된 것이고 안중근은 진실을 호도하기 위해 내세워진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다는 황당한 얘기까지 지어내고 있다. 요컨대 이토는 사실 더 위대했으며 안중근은 생각보다 어리석었다는 투의 비열한 공작이며, 그것은 메이지 유신 찬양과 조선식민지배 정당화론과 연결돼 있다. 일본 초대 총리에 이어 제5대, 7대, 10대총리까지 역임했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그 초대 통감까지 지낸 자, 명성황후 시해를 직접 지시한 사실까지 밝혀진 자가 졸지에 ‘한일합방’ 반대론자로 둔갑하다니. 이토에겐 통감부 치하의 조선이나 총독부 치하의 조선이나 식민지이긴 매한가지였을테니 굳이 모양새 구겨가며 ‘합방’티를 내는 총독부 설치를 서두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