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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0 16:53 수정 : 2006.02.22 19:46

스피드의 차이
가토 요코 지음/박영준 옮김, 근대일본의 전쟁논리, 태학사

아깝다 이책

한국은 병인, 신미 두 양요를 거치면서 쇄국을 강화한 반면, 1853년 미 해군 제독 페리의 무력 시위에 굴복해 개항함으로써 문호를 연 일본은 같은 방법을 한국에 적용하여 개국하게 하였다. 그 이후의 한국과 일본의 대응에는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일본은 막번체제를 마감하고 천황제로 복귀하면서 소위 메이지유신을 이룩한다. 그들은 의회를 설립하고 군비를 증강하였다. 청일, 러일, 중일, 태평양 전쟁은 이러한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메이지의 정치 지도자들은 군비증강이 자연 국민의 부담을 증가시키지만, 그 부담은 전쟁에 패배하였을 때 부담하는 배상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프로이센에 승리한 프랑스가 받은 1억만의 배상금은 국민의 세금 10배에 해당하는 것임을 들어, 군비증강에 드는 비용이 전쟁에 패했을 때 부담할 배상금보다는 훨씬 싸다고 선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러한 자금을 해외에서 조달하려고 하였다. 그 1차 대상이 조선이었다.

고종시대 새로 주조한 백동화는 악화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주 잘못 전해진 악성 루머였음이 최근 연구에 의해 확인되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을 한창 치르고 있을 때였는데, 일본의 재정상태는 최악이었다. 러시아가 보유한 함대나 무기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군사력 증강에 진력하였기 때문에 정작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돈이 없어 미국과 영국에서 17억 엔 이상의 차관을 얻어야 했고, 그래도 모자란 돈을 한국의 재정을 통해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러일전쟁의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일본은 한국에 메가타 쓰네타로라는 재정고문을 투입하였고,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일본의 제일은행권을 통용시키는 일이었다.

일본은 유럽으로부터 신문물을 수입함은 물론이고 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면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진입을 가속화하였다. 여기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 생산제품을 판매할 소비지가 필요하였다. 마치 영국이나 프랑스가 자국의 제품을 소비할 곳을 찾아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았듯이 일본도 이러한 대상을 찾았고, 그것이 한국과 중국과 동남아였으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외국문물 수입을 위한 한국의 노력은 청국과 일본에 사절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미국으로 사절을 보낸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귀국하여 개혁을 주도한다. 그런데 이 개혁은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니 내부의 반대세력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였다.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외국의 사주를 받아 이러한 계획을 훼방하는 역할을 한다. 그 때문에 추진속도도 늦어졌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발전의 모습을 본 일본으로서는 정말 그대로 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격변기 일본에서 지도자와 국민을 하나가 되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다. 생명과 재산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을 온 국민들이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게 한 것은 리더십이었다. 전율과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정도의…. 근년 들어 일본에는 그 우익보수 세력들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이 책에서 그들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고 앞으로 전개될 양상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변선웅/태학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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