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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0 16:56 수정 : 2005.10.21 18:08

어린이 와 평화
박기범 지음. 창비 펴냄. 9800원

쓰러진 아이가 있다면 들쳐업고 뛰겠다 피흘리는 아이가 있다면 피라도 닦아주겠다 전장 뛰어든 동화작가 눈에 포착된 떠돌이 아이들… 어른을 향한 ‘서러운 동화’의 마지막 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전범으로 기소한다”

동화작가 박기범을 누가 반전투사로 만들었는가. 툭하면 눈물바람인,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문제아’를 누가 전장으로 내몰았는가.

석유를 둘러싼 어른들의 탐욕에서 비롯한 이라크 전쟁. 탱크와 폭탄의 폭력은 매양 어른들을 겨냥하지만 희생되기는 약한 어린이들. 이러한 모순이 비단결 같은 작가를 ‘미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작가는 이라크 전쟁이 나던 해인 2003년 2월28일~3월5일, 3월13~17일, 4월2~12일, 6월20~7월31일 네 차례 바그다드를 다녀왔다. <어린이와 평화>(창비 펴냄)는 그 기간 동안의 현지 보고서다. 이라크는 아직 전쟁 중이라는 주장에 기대면 위 기록은 ‘박기범의 이라크 전쟁기’인 셈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지 모른다. 하지만 쓰러진 아이가 있다면 들쳐업고 뛰겠다. 피흘리는 아이가 있다면 피라도 닦아주겠다.” 그해 4월 초 기자도 의사도 아니면서 무엇하러 전쟁터로 들어가려고 하느냐는 암만주재 이라크대사를 설득하여 비자를 받아내는 것이 고행의 시작이다. 작별전화에서 아버지는 마지막 부탁이라며 가지 않으면 안되느냐고 나직이 물었고 형은 꺽꺽 숨을 참다가 끝내 큰 소리로 울었다.

실제로 작가가 ‘전쟁’중 바그다드에 머물기는 열흘 정도. 짧기도 하려니와 폭격 속의 방공호 생활은 기록조차 힘들었다. “미군 탱크의 행렬에 옷을 벗어 흔들며 뒤를 따르며 좋아하는 시민들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 문득 반세기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마을을 접수하는 군복 빛깔에 따라 인공기와 태극기를 번갈아 숨기고 꺼내가며 흔들어야 했던 그 역사가 떠올랐다.”(136쪽) 수많은 생생한 전쟁 리포트에 비하면 그의 경험과 시야는 아주 좁다. 그나마 ‘겁에 질려, 숨가빠, 그리고 절망으로’ 전쟁일지는 끊겨 있다. 뜨거운 리포트는 몇 장의 사진이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박기범 전쟁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어린이를 통한 전쟁의 비극이다. 온통 어린이한테 쏠린 그의 기록에서 한편의 서러운 동화가 둥두렷이 빠진다. 바그다드의 한 호텔에서 만난 두 구두닦이 소년 하싼과 쎄이프 이야기가 그것.

“가지 말라” 꺽꺽 참다 울어버린 형


보름만에 다시 만난 하싼의 신발은 다 찢어져 있었다. 엄지 발가락이 나와 있고 전보다 훨씬 말라 보였다.(128쪽) 다음에 크면 아메리카와 싸우겠다던 하싼은 더이상 구두를 닦지 않았다. 대신 미군들에게 담배를 팔고 있었다. 쎄이프는 부모도 집도 없이 떠돌게 된 처지. 구두닦이 통도 빼앗겼는지, 잃어버렸는지 없다. 쫓겨다니며 길에서 잠을 자고 구걸을 해서 배를 채운다.

전쟁 전부터 하싼과 쎄이프는 함께 구두통을 메고 다니던 동무였다. 그런데 지금은 둘의 처지가 아주 달라졌다. 하싼은 집에서 식구들과 같이 생활했으나 쎄이프는 거리의 아이가 되었다. 그래봐야 전쟁통에 먹을거리를 찾아 미군 주위를 배회하는 가난한 아이들에 불과하지만.(215쪽)

하싼의 집을 찾아간 작가. 베란다에 잠시 나갔다가 음료수 차례가 가지 않은 쎄이프는 ‘거리의 아이’란 자격지심에 울상이 된다. 그를 달래려 작가는 쎄이프한테 닭고기를 사주마고 약속한다. 그 인연으로 그를 비롯한 몇몇 거리의 아이들한테 매일 밥을 사주게 된다. 어떤 소년한테는 어물어물 운동화를 사주기도 한다. 자신이 묵는 여관에 데려와 목욕을 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머물 수 있는 기간은 한정된 터.

전후 바그다드 하싼의 집 베란다. 전쟁은 구두닦이 소년 하싼과 쎄이프의 운명은 갈랐다. 하싼은 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쎄이프는 집도절도 없는 거리의 아이가 되어 미군 주위를 배회한다.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동화작가는 여전히 슬프다.
한날, 마당에 앉아 봉사단이 남긴 음식을 먹는 고양이들을 보고 있다가 문득 그가 속한 봉사단이 떠나고 나면 얘들은 이제 무얼 먹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든다.(226쪽)

쎄이프도 전쟁 전에는 구두를 닦으며 어렵지만 제 힘으로 살았다. 지금은 앵벌이다. 호텔에 드나드는 외국인들은 쎄이프처럼 어린아이들이 매달리면 십달러, 이십달러를 아무렇지 않게 쥐어준다. 그건 어른들이 한달 일해 버는 것보다 큰 돈. 아이들이 구두닦이통을 내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 아이들에게 밥 한끼를 사줄 게 아니라 구두닦이라도 할 수 있게끔 구두통을 마련해 주었어야 하지 않는가.(241쪽) 작가의 시선은 스스로에게 향한다.

더러운 아이와 함께이어도 받아줄 식당을 찾아 세 시간여 문전박대를 당하며 길을 헤맸다. 그들은 지쳐 있었다. 쎄이프에게 무얼 더 어떻게 해주어야 할까? “자, 이리 올라타.” 쎄이프 앞에 쪼그려 앉아 목덜미와 어깨사이를 가리켰다. 쎄이프가 올라탔고, 그는 목말을 태우고 힘껏 내달렸다.(242쪽)

바그다드를 나오던 마지막 밤. 쎄이프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눈빛으로 말했다. “나도 코리아에 가요? 나도 데리고 가요? 아이 원트 고 투 코리아.”

돌아온 작가는 이 나라 대통령을 전범으로 기소한다.

“이 나라 대통령은 … 우리 모두를 침략자, 학살자, 약탈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 내가 아이들과 함께 가꾸고 배워온 평화와 자유, 생명과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를 몽땅 짓밟고 뭉개버렸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전범으로 기소하는 이유는) 우리 아이들이 탐욕과 거짓, 폭력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만든 죄, 우리 아이들의 꿈을 모두 빼앗아 간 죄입니다.”

우리가 떠나면 애들은 어떡하나

후일담.

그로부터 2년. 강원도 울진군 죽변에 머무는 작가는 하싼과 쎄이프의 생사를 모른다. 연락할 길이 없고 그들을 만나고 싶어도 못간다. 이라크의 친구들은 그의 안전은 물론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오지 말라고 말한다. 외국인과 관계가 있는 사람은 테러의 표적이 되기 쉽다는 거다.

작가는 그동안 단식 평화순례, 한국-이라크 어린이 편지 주고받기 등 반전운동을 하다가 두달 전부터 비로소 조금씩 원고지를 마주 대하고 있다. 다음 주에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에 합류해 도법, 수경 스님과 함께 하염없이 걸어볼 참이다. 그는 이번 정기국회 회기에 파병 재연장안이 처리될 듯한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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