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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섭섭하겠지만 책방이 아나라 창고다. 주인이 머물던 자취는 책 틈의 전화기가 가끔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20여년 헌책방을 순례한 눈썰미. 무작위로 모은 2만여권의 책을 한차례 흩어보내고 다시 1만여권을 모았다. 그중에서 조금 헐어 책방을 시작했다. 주로 인문계통의 책이다. 논문집, 비매품 등 다른 데서 보기 힘든 것들이 자주 눈에 띈다는 한 손님의 귀띔이다. 아침부터 세수만 겨우 하고 그러모은 책들은 단골들이 얼추 빼가고 나머지는 고여 패총처럼 쌓인다. 주인도 3~4일 지나면 안쪽에 무슨 책이 있는지 모른다. 안다 해도 도대체 빼줄 수 없다. 이곳은 뜨네기가 책을 보면서 고르는 곳이 아니다. “빨리빨리 순환돼야 하는데… 그게… 손이 많이 가고… 책은 묻히고….” 주인은 팔기보다 책 구하는 데 열심이다. 책무지의 표면적이 자꾸 줄어 단골과 비단골의 느낌은 자꾸 벌어진다. 좁은 공간의 비애. 문제는 공간과 책욕심의 부조화다. 시장을 거쳐 찬거리 비닐봉지를 들고온 주부. 책을 골라 역시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들었다. 아이들과 자신을 위한 몸과 맘 먹거리다. 길 건너 출판사 사장이 슬리퍼 바람으로 책 구경이다. 은퇴한 백발의 교수가 “새로 들어온 책 있나?” 하고 물었다. 방금 전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던 곳에서 물고기를 개울밖으로 건져내듯 책을 툭툭 골라냈다. <태초 그 이전>, <로마문화 왕국, 신라> 등등. 눈 먼 사람과 눈 뜬 사람의 차이. “모으려는 사람, 읽으려는 사람, 구별돼요.” 분야에 상관없이 눈에 확 띄는 책을 골라가는 사람은 영낙없이 모으는 사람이다. 그는 읽는 사람한테 파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증정본 책을 판다기에 엿본 신문쟁이의 서고. 쟁여두느니 싸게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가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복원되는 청계천의 상류. 내년 5월께 복개판 위에 세워진 시장이 뜯기면서 책방도 옮겨야 한다.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생각이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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