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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0 18:44 수정 : 2005.10.21 18:10

민족정신의 전통을 단절시킨 <삼국사기>를 해체하고 민족을 역사 주체로 서술하려 했던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 신채호에게 광개토왕비는 민족사의 상징물이었다. 단재는 민족사의 재정립을 위해선 <삼국사기>에 서술된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광개토왕 비문을 한 번 보는 게 더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진은 중국 시안에 있는 광개토왕릉비 전경과 그 탁본. (출처 <광개토왕릉비 탁본도록>(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왕조사’에서 ‘민족사’로 역사 재정립 “삼국사기 고구려사 만번 읽는것보다 광개토대왕 비문 한번 보는게 낫다” 사대주의 뿌리인 ‘정사’ 삼국사기 해체 근대국가의 민족사관 아직도 위력 ‘세계속 한국사’로 확장될 날은…


신채호 ‘조선상고사’

한국 중학교 국사교과서는 한국사를 “우리민족이 걸어온 발자취이자 기록”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민족’이란 누구인가. 우리민족이란 한국사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지, 한국사를 정의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민족의 역사’이기에 앞서 ‘역사의 민족’이어야 한다. 이렇게 민족을 초역사적인 실체로 전제하고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바로 ‘국사’다. 그런데 ‘국사’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만들어진 역사서술 모델이다.

한국 역사학에서 ‘국사’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한국사만을 특별하게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쓰인다. ‘국사’란 역사로써 민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으로써 역사를 구성하는 한국 역사학의 특수성을 대변하는 개념이다. 이런 ‘국사’ 개념의 창시자는 단재 신채호(1880~1936)다.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그의 정의에 입각해서 한국 근대 역사개념이 형성됐다. 따라서 여전히 ‘국사’의 틀에 의거해 한국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한국사학계에서 신채호는 ‘숨은 신’이다.

역사의 3요소는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에 대한 정의는 이 세 가지 역사의 필요조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중심으로 내려진다. 예들 들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정의는 시간을 중심으로 한 정의다. 이에 비해 신채호는 인간을 중심으로, 그것도 보편적인 인간이 아닌 ‘아’라는 특정집단, 곧 민족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를 정의했다. 왜 그랬을까.

서구 근대 역사개념과 비교해 볼 때, 한국 근대 역사개념의 특이성은 처음부터 세계사와 분리해 ‘국사’를 정의했다는 점이다.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신채호는 역사란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하는 정신적 활동의 상태를 기록한 것이라는 일반적 정의를 내린 뒤, 역사를 세계사와 조선사로 나눴다. 세계사가 세계 인류의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라면, 조선사란 조선 민족의 그러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세계사와 ‘국사’를 각기 다른 역사로 기술하는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국사>와 <세계사>는 각각 다른 교과서로 서술된다.

동아시아 역사전쟁의 원인 ‘민족’


‘국사’와 세계사의 구분은 한국에만 고유하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서구의 근대를 모방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것과 독립해서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시켜야 했던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된 현상이다. 서구 근대 역사개념이 인류 전체의 역사를 포괄하는 보편사를 지향했다면, 일본, 한국 그리고 중국의 동아시아 근대 역사개념은 동일하게 그런 서구 보편사에 대항해서 민족사의 정립을 목표로 삼아 성립했다. 동아시아 근대 역사개념이 이처럼 민족주의적 기원을 갖는다는 태생적 한계가 동아시아 역사전쟁을 재연시키는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근대의 여명은 중화세계질서의 해체와 더불어 밝아왔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의 참패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우주의 중심이 바뀌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같은 충격이었다. 중국이 더 이상 태양이 아니라면, 조선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제국으로서 중국의 붕괴와 함께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사대주의가 더 이상 조선의 생존전략이 될 수 없음이 명확해졌다. 이제는 조공과 책봉에 의한 외교상의 형식적 지배가 아닌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군사적인 실질적 지배를 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20세기 초 조선은 중화주의라는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탈피했지만,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식민지로 전락할 운명에 처했다. 한국 근대 역사학은 이런 현실의 위기에 대한 역사적 진단과 미래를 위한 역사적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당위로부터 성립했다. 제국주의가 강자의 논리였다면, 약자의 논리는 민족주의가 되었다. 한국 근대 역사학의 창시자 신채호는 일본에 의해 주권을 빼앗긴 조선이 독립국가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의 전체 과거를 총체적으로 서술하는 통사로서 ‘국사’의 정립이 요청된다고 믿었다.

‘국사’의 성립 이전 전근대에서 역사는 왕조사로 서술됐다. 왕조사는 어느 왕 다음에 어느 왕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왕실의 계통만을 기록하거나, 천명이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왕조가 건국됐다는 왕조의 기원을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 서술됐다. 신채호는 이런 왕조 중심의 역사와 민족사로서 ‘국사’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사’는 왕조의 교체나 왕위 계승이 아니라 민족정신의 계통을 중심축으로 해서 서술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민족정신의 계통은 국조(國祖) 단군을 출발점으로 해서 부여, 고구려를 거쳐 신라 화랑도로 이어지는 국선(國仙)의 전통이었다.

이런 국선의 전통이 단절됨으로써 민족사의 상실을 초래한 결정적 계기는 그가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던 ‘묘청의 난’이었다. 묘청과 김부식의 싸움은 민족 전통사상과 중국 유교사상의 투쟁이었으며, 여기서 전자가 패함으로써 민족정신이 단절되었다. 또한 김부식은 자신의 승리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삼국사기>를 저술함으로써 무정신의 역사를 왕조의 공식적인 역사로 만드는 정사(正史)의 전통을 확립했다. 따라서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해체하여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재설정할 목적으로 <조선상고사>를 저술했다. 그는 민족사의 재정립을 위해서는 광개토왕 비문을 한번 보는 것이 <삼국사기>에 기술된 고구려사를 만 번 읽은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신채호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유일한 정사로 만들기 위해 전해, 내려온 <화랑세기>, <(구)삼국사>와 같은 옛 기록을 궁중에 비장(秘藏)하거나 소실시켰다고 비판했다. 이후부터 개인의 역사편찬은 금지당하거나 야사(野史)로 취급됨으로써 왕의 명령으로 편찬된 역사만이 정사로서 인정받는 전통이 확립됐다. 정사란 기본적으로 조선과 중국을 조공과 책봉 관계로 규정하는 중화사상에 근거한 사대주의 역사였다. 이런 정사의 전통은 ‘조선의 공자’가 아니라 ‘공자의 조선’을 만드는 규율권력으로 작동함으로써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그 결과는 조선의 일제 식민지로의 전락이었다. 하지만 그는 국가라는 몸체는 빼앗겼지만, 역사라는 정신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주독립 국가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독립투쟁의 일환으로 역사를 연구했다. 따라서 그는 역사를 위해 민족을 연구하는 역사가이기 이전에 민족을 위해 역사를 연구한 애국지사였으며, 그 덕분에 한국 근대 역사개념이 성립할 수 있었다.

‘묘청의 난’ 실패 1대사건

통일 민족국가 건설은 아직도 미완성 상태다. 그래서 민족사관을 여전히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국사 연구자들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국사교과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이데올로기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진보세력이 정권을 획득하면서 민족과 민중이라는 상이한 코드를 기묘하게 결합시킨 민중사관에 의거해서 서술된 교과서가 주류를 형성했다. 이에 대항해 ‘뉴 라이트’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좌파와 우파 모두를 포섭하는 민족이 아닌 남한국가를 주체로 한 대안 교과서를 집필하고자 한다. 후자에게 ‘아’는 민족이 아니라 국가이고, ‘국사’란 민족사가 아니라 국가사이다.

‘국사’를 보는 관점의 차이는 ‘6·25전쟁은 북한이 시도한 통일전쟁’이라는 강정구 교수의 발언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서도 드러났다. 김춘추의 백제와 고구려 침공은 삼국 통일전쟁이고, 후삼국시대 왕건도 그런 통일전쟁을 벌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남북한이 각자 방식대로 ‘민족통일’을 추구했던 6·25 전쟁은 통일전쟁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국사’를 민족사가 아닌 국가사로만 보는 냉전적 발상에서 비롯했다. 북한의 역사는 더 이상 우리 ‘국사’가 아닌 셈이다. 만약 그렇다면 영토 대부분이 현재의 북한에 속해 있었던 고구려가 우리 ‘국사’로서 인식되어야 할 근거는 무엇인가?

김기봉/경기대 교수·역사학
이제는 한국사를 ‘국사’로만 파악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우리는 이미 탈근대 세계화시대에 살고 있는데, 우리 역사개념은 아직도 근대 민족주의시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한국 역사학의 후진성이다. 삶의 현실이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화시대에서 우리 역사문제를 민족사적인 차원으로 축소하는 ‘국사’의 시각은 시대착오다. 따라서 21세기 한국 역사학은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역사 정의에 입각해서 민족사관을 정립시킨 ‘국사’의 아버지 신채호의 품에서 벗어나 탈민족주의 시각에서 ‘세계 속의 한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지를 화두로 삼아야 한다.

50자 서평

◇ 박인호(45·금오공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이민족 중심의 국사 체계를 뒤집어엎고 우리 역사를 민족적 시각에서 서술한 한 시대의 대표적 역사서”

◇ 박준태(알라딘 마이리뷰에서) “여러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삼국사기의 오류가 과연 이리도 많았는가? …허나, 당시로선 뛰어난 역사학자였고 지금도 그 개인의 능력을 크게 봐줄만한 책이다.”

◇ 미래의 눈(〃) “일제의 탄압을 피해 먼 이국 땅에서 민족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쓴 조선사연구(초)는 암흑시대를 밝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서적일 것이다.”(신채호 <조선연구사(초)>(범우사 펴냄)를 보고)

▽ 다음주 이후 고전 <신곡>, <자유론>, <소학>·<대학>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서평자 추천 도서

단재 신채호 전집 (상·중·하·별집)

신채호 지음,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엮음

형설출판사 펴냄(1972, 1975, 1977), 각권 1만5000원

(국한문 혼용의 고어체로 씌어진 원문)

조선상고사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엮음

일신서적 펴냄(1998), 9000원

(일반인이 읽기 쉽게 현대어로 풀어씀)

조선사연구초

신채호 지음, 박인호 옮김

동재 펴냄(2003), 1만2000원

(전문가에 의한 현대적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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