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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0 18:54 수정 : 2005.10.21 18:10

유용주 산문집 <쏘주 한 잔 합시다>

하룻밤 풋사랑, 가족·일상 이야기 부산에서 두바이까지 17일간의 승선일기 ‘밑바닥의 시인’ 힘주어 말하다 삶과 문학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시인 겸 소설가 유용주(45)씨가 두 번째 산문집 <쏘주 한 잔 합시다>(큰나)를 펴냈다. 엠비시(MBC) <느낌표!> 프로그램에 선정된 베스트셀러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이후 5년 만이다.

두 산문집의 제목은 어딘가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앞선 책의 제목이 개별 주체의 고독한 의지를 피력하는 데 비해 새 책의 제목이 술을 매개로 한 어울림을 제안하고 있다는 차이에도 아랑곳없이 그러하다. 앞의 것이 1인칭으로서 닫혀 있고 뒤의 것이 이인칭을 향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러하다. 주체는 객체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개체는 전체 속의 일부이므로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경지가 아니거니와, 유용주씨의 산문들에서 개별적 삶의 의지와 공동선의 추구는 분리되거나 대립하지 않고 조화로이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에게 삶과 ‘쏘주’는 삼투와 습합의 관계를 지닌다.

책 속에 ‘쏘주 한 잔 합시다’라는 제목의 표제 산문은 없다. 책 제목은 말하자면 수록된 글들 전체의 분위기랄까 주제를 압축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엔 또한 흥미로운 뒷얘기가 있다. 다름 아니라 출판사 쪽에서 먼저 책 제목의 저작권을 등록해 놓은 뒤에 그 제목에 어울리는 작가를 물색했다는 것이다. “학력 별무에 막노동으로 밑바닥에서부터 문학을 시작한 나에게 아닌 게 아니라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며 작가는 허허 웃었다.

제목이 작가를 고르다?

제목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소주에 관한 언급은 책 속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지붕 낮은 곳에서 허름한 일꾼들과 소주잔을 밤새 돌린 적도 있고”(28쪽), “하늘에는 소주 색깔 별이 떠 있”(147쪽)는가 하면, 소주가 귀한 외항선에 올라서는 “삼겹살을 안주 삼아 처음으로 소주를 마음껏 마셨”(85쪽)노라며 흡족해한다. 존경하는 문단의 어른 앞에서 한껏 재롱을 피워서는 그 이가 “거듭 소주 잔을 비”(173쪽)우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기도 한다. 목수 시절 스승이자 가히 인생의 스승이라 일컬을 법한 이가 일찍 돌아가자 고향 뒷산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해마다 씀바귀로/해마다 냉이 달래/해마다 다북쑥으로/다시 돋아나라고/그의 딱딱한 흙가슴을 열고/맑은 소주 한 잔을/고루고루 뿌려주었다”(시 <스승 김인권>).

몸이 고될수록 더 팔딱이는 언어들-유용주 산문집 유용주 산문집 <쏘주 한 잔 합시다>
책은 모두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동료 시인 이정록·이면우·이원규씨의 시집과 산문집을 읽고 쓴 글들과 군 입대를 앞두었던 막막한 무렵에 경험한 하룻밤의 풋사랑을 회고한 글이 제1부를 이룬다. 2부는 지난 4월 중하순 현대상선 컨테이너선에 타고 17일 간 항해하면서 쓴 일기체의 글들이고, 3부는 일상에서 건져올린 경구들, 4부는 가족사와 문학수업을 주제로 한 비교적 짧은 산문들이 묶였다.


맨 앞에 실린 <오래된 사랑>은 군 입대를 앞두고 고향을 찾은 길에 만난 동생 뻘 되는 소녀와의 기약 없는 사랑을 돌이킨다. 버스의 차장으로 일하고 있던 소녀는 “손님, 표 주세요”라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처음 다가왔다가는, 구면인 것을 확인하고 다정하게 밥과 술을 나눈 뒤 “오빠, 우리 어디 갈까?” 젖어드는 말로 행로를 모색하다가, 마침내 하룻밤 풋사랑을 나누고 난 아침에는 “오빠, 나, 오늘 첫탕이거든. 먼저 갈게”라는 메모 글씨로써 작별을 고한다.

다른 글들에서 작가는 주로 삶과 문학의 관계를 천착한다. 그에게 삶과 문학은 나란히 엄정하고 고귀한 것이며, 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관계에 놓인다.

“삶은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진다. 질겨진다. 촘촘해진다. 깎으면 깎을수록 빛이 난다. 쪼면 쫄수록 엄정해진다. 닦으면 닦을수록 광채가 난다.”(51쪽)

“결국 문학이란 사람살이에서 오는 눈물겨움 아니던가. 잘 드러나지 않은 그늘의, 배면에 깔려 있는, 생명 있는 것들의 안쓰러움 아니던가.”(29쪽)

그가 생각하기에 “좋은 삶에서 좋은 문학이 나”(51쪽)오며 “엄정한 삶에서 엄정한 작품이 나”(53쪽)오지, “흐트러진 삶에서는 엄정한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56쪽)

‘17일간의 승선 일기’라는 제목이 붙은 제2부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내의 ‘죽음의 조’로 일컬어지는 시인 박남준·안상학, 소설가 한창훈씨와 한 조가 되어 부산에서 두바이까지 외항선을 타고 갔던 날들의 기록이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광대한 바다와 일월성신의 조화, 날치 떼와 돌고래의 군무는 그로 하여금 새삼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여기 와 보니 내가 너덜너덜한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온통 해진 투성이다. 꿰맨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감출 수가 없다. 헌 몸 헌 마음 하나가 가엾게도 바다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수술 좀 해달라고, 깨끗이 지워달라고.”(122쪽)

생체험서 우러난 살아있는 비유

첫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도 그렇고 ‘유용주의 노동일기’라는 제목으로 <한겨레>에 연재했던 자전적 성장소설 <마린을 찾아서>에서도 그러한데, 유용주씨의 문장은 생체험에서 우러난 살아 있는 비유로 하여 더한층 읽는 맛을 준다. 그가 지향하는 문학이 삶의 밑바닥에서 건져올린 구체성에 기반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의 문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을비, 쓰러진 나락 모두 썩힌 가을비, 생강 누렇게 병들게 한 가을비, 빨래 눅눅한 가을비, 정화조 시체 썩는 냄새 올라오는 가을비, 꽃잎 처연히 떨어지는 가을비, 추운 가을비, 술 생각도 나지 않는 가을비, 전깃줄 울어 예는 가을비, 잠이 오지 않는 가을비,”(154쪽)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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