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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0 19:06 수정 : 2005.10.21 18:10

단풍에게 진보를 묻다

진보란 공생을 향한 마음씀 절도 진보하고 영화도 진보하고 남북 하나되는 ‘동막골’ 800만 감동했는데 6·25 다른 견해가 보안법 위반이라고?

세설

어디로 갈까. 설악산이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내 오감을 충전시키는 산이라면 오대산은 참 넉넉하여 들어가 울 수 있는 산이다. 오대산으로 향했다. 여름향기를 잘 거두어 가을향기로 익히고 있을 월정사 전나무숲 길이 걷고 싶었다. 나무들의 냄새가 계절마다 달라지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전나무숲이나 솔숲 같은 침엽수림의 향기는 특히 그렇다. 낙엽송 숲의 향기가 그렁그렁하고 물큰하게 감성의 밑바닥을 자극해 온다면 침엽수림의 향기는 뒤돌아 삼키는 눈물 같은, 이성과 감성이 팽팽하게 조율된 견인의 힘이 있다. 자신의 내부를 향해 바늘잎을 들이대는 성찰의 향기. 시월 초에, 내 몸이 그리워한 향기가 그쪽에 있었다.

오대산으로 가는 국도. 나는 연신 “아유~, 아유~!” 탄식을 연발하며 산굽이를 돌았다. 시월 초의 산빛은 단풍을 말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단풍을 ‘노는 일’은 실은 그때부터다. 산빛을 평정했던 초록이 기꺼이 자신의 보색들을 수긍하고 낳기 시작할 때, 변화의 미세한 기미가 기껍고 귀하게 수용된 초가을 산빛의 묘한 역동성! 그 조용조용한 단풍의 예감을 즐기는 일이 불붙은 단풍의 절정을 노는 일만큼이나 마음 설레는 일이란 걸 초가을 산행을 다녀본 이들은 알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에서는 마침 불교문화축제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 몇 년 새 사찰에서 이뤄지는 축제들이 부쩍 늘었다. 절집 마당에 꾸며진 무대에서 밤 이슥토록 펼쳐지는 국악공연을 즐기며 “저기 뭐래요?” “해금이래요.” “공후라네요.” 저마다 속삭이며 손을 잡거나 어깨를 나눈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단풍의 징후만큼이나 즐거운 변화의 예감을 만끽했다. 대중과 유리된 고답한 불교가 아니라 대중 속의 부처를 보려 하는 마음의 발원이 느껴지는 초가을 밤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전국의 유명하다는 절집들에서 마음 아파한 경우가 많았다. 규모 중심의 물량주의적 가치관이 저질러놓는 문화적 참사들을 너무나 종종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아름답던 흙담과 돌담을 무너뜨린 자리에 번듯한 석축이 둘러쳐지고, 미학적 고려 없는 개보수와 증축이 절의 규모를 넓히는 방향으로만 마구잡이로 행해지는 경우들. 이 천박한 소비자본주의 속도 속에서 안식을 얻지 못한 나 같은 중생이 찾아가 마음을 쉬기에 얼마간 불편한, 일체중생의 불성을 깨우고자 하는 정신문화의 도량이라기엔 물질이 너무나 승해 슬퍼진 절집들이 허다했던 것이다.

이제 불가도 옷을 바꿔입기 시작했다. 인류의 거의 모든 종교가 당연시해온 남성 본위의 종교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새로운 목소리들이 조금씩 물꼬를 트고 있고, 일주문을 떡 벌어지게 박아놓는 불사를 잘했다고 여기던 구태를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갈수록 부박해져가는 현대문명 속에서 마음밭이 힘들어진 중생들을 끌어안고 위무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몸짓들이 느껴진다. 그간의 한국불교가 지닌 귀족불교의 분위기가 조용한 변화를 맞고 있는 듯하여 나는 즐거워진다. 예술이 그렇듯 종교 역시 ‘귀족’이 되고자 하는 순간 타락하기 쉬운 무엇이기에.

먹거리의 시식과 판매에 일회용 용기가 남용되고 우리 문화의 고갱이로서의 불교문화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고즈넉함이 부족하긴 했지만, 강원도 산간의 한 절집에서 벌어진 축제의 장에서 우선 기쁜 마음이 들었던 것은 변화의 생동감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변화의 방향성이 ‘원래 자리’인 낮은 곳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축제를 보러 온 외지사람들과 산골주민들이 삼삼오오 어울려 절집 마당에서 상영되는 <웰컴 투 동막골>을 보기 위해 앉아 있는 모습을 뒤로 하고 월정사를 빠져 나왔다. 내려오는 길에 “시작했나?” “늦었잖우야.” 주고받으며 경내로 들어오는 아주머니 몇 분을 스쳐 지났다. “배에미 나와. 물리면 마이 아파.” 영화 대사가 절집 마당으로 번지고 등 위에서 아이들이 까르륵 웃음보를 터뜨리는 소리를 들으며 전나무 숲길을 걸어 내려 왔다. 오대산을 벗어나기 직전, 낮 동안의 산빛이 스며있는 어둠 속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나는 엽서를 썼다.

단풍의 예감으로 두근거리는 산빛입니다. 벗! 단풍을 놀 때가 왔나봐요. 어서 나가 보세요. 절정이라는 때에 몰려가지 말고요. 저 초록 속에서 단풍은 벌써 시작입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아파트 공원 앞에 그대가 마음 준 나무 한그루가 어떻게 단풍의 기미를 보이고 절정을 맞으며 기꺼이 자신을 낮은 곳의 대지로 데리고 가는지, 가장 간소해진 몸으로 어떻게 겨울로 가는지 지켜봐 주세요. 어떻게 봄을 맞는지를.


초가을 단풍이 내게 던져준 것은 뜻밖에 진보라는 말이었다. 진보란, 공생하는 법을 향한 지극한 마음씀일 터. 자신의 보색을 기꺼이 수용한 단풍의 미감 같은 것. 다양성이 수용되지 않고서는 순환하는 생명의 주기도 끝나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을 산빛의 역동성 같은 것. 시월이 중반을 넘어선다. 한결 이윽해졌을 단풍을 놀러 길 나설 채비를 하는 차에 슬픈 소식을 들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한 사회학자의 학문적 견해에 대해 결국 사법처리가 진행된다는 소식이다.

김선우/시인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란다. 세상에, 국가보안법이라니! 강원도 산골의 고즈넉한 절집에서 <웰컴 투 동막골>을 보던 주민들이 떠오른다. “근데 있잖어. 쟈들하고 친구나?” 미소를 번지게 하던 그 대사의 주인공들인 북한군과 남한군이 정말로 친구가 되는 그 영화를 800만이 넘는 남한 관객이 보았다고 하지 않는가. 엽서의 추신을 쓴다. 벗이여, 급합니다. 어서 단풍놀이를 떠나야 하겠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단풍에 열광하는 것은, 혹여 인간이 그처럼 아름답게 변해가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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